귀중한 금가루라도 눈동자에 앉으면 시야를 가리는 하나의 이물질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어떤 권위 있는 인물이 전하는 드넓고 깊은 도리일지라도 눈과 귀에 붙여두면 안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달라붙은 그 무엇을 떼어내거나 그대로 두거나 종횡으로 한결같은 솜씨를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동쪽 집에서 등을 밝히지만 서쪽 집에서는 어두운 그대로 지내는 것과 같은 대조되는 풍경이 펼쳐져도 아무런 충돌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백수본인(白水本仁)의 문답이 화두로 회자되어 왔다.

백수본인이 “눈 안에 모래가 붙으면 안 되고, 귀안에 물이 차면 안 된다”라고 말하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눈 안에 모래가 붙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진실에 응함에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 “귀안에 물이 차면 안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

학인은 스승이 간직한 여분의 생각을 끄집어내고자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다. 그는 모래가 붙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물으면서 사실은 한 줌의 모래를 움켜쥐고 백수의 두 눈을 향해 뿌렸고, 물이 차면 안 된다는 뜻을 묻는 척하고서 한 주걱의 더러운 물을 스승의 두 귀에 부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백수선사 자신이 학인에게 던진 말이 부메랑이 되어 면전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백수선사의 응답을 살펴보면 학인이 독하게 쏘아붙인 질문으로 눈이 가려지거나 귀가 막히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교하거나 겨룰 상대가 애초에 없었으므로 제자가 승부를 걸어왔지만 본래 잃을 것도 새롭게 덧붙일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 사제 간의 문답에 본분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은 어떤 것일까? 이런 유의 의문을 던지고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한 마디 마다 칼끝이 맞닿은 듯이 거래된 이 문답의 긴장감은 놓치고 만다. 이런 자들에게 백수의 말은 법이 되어 스스로 현혹된 많은 이들이 그 법망에 걸려 빠져나갈 방도를 모색하게 된다. 이들을 일깨우고자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오지 않았고, 혜가는 인도로 가지 않았다”라고 하는 말이 약으로 남아 있다. 백수와 그 제자는 서로 팔아먹을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면서 짧은 순간에 값을 부르거니 흥정을 하거니 옥신각신하다가 각자 상대의 비밀을 누설시켰던 것이다.

이 공안에 대한 설두중현(雪竇重顯)의 평가가 돋보인다. 그는 “눈 안에 모래가 붙으면 안 되고, 귀안에 물이 차면 안 된다”라는 백수본인의 말에 대하여 세 가지로 상이하게 응답했다. 먼저 “만약 이 말을 받아들여 확고하게 붙들고 지킨다면 그 누구의 말에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조사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인들 무슨 쓸모없는 소리이겠는가!”라고 했다. 그 누가 되었건 이 전장에서 자신과 맞설 상대가 없는 준엄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디에도 물들지 말라는 백수선사의 뜻을 충실히 전한 말이다. 또한 “눈 안에 수미산과 같이 거대한 도리를 쌓아 두고, 귀안에 바다와 같이 드넓은 소식을 담아두고서 보통 사람들과 같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해도 좋다.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도 용이 물을 만나고 호랑이가 산에 사는 것과 같이 걸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 반대편에 숨은 의미가 보이도록 하였다. 눈과 귀로 이것저것 보고 들어도 무방하다는 취지를 밝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된다. 그런 다음에는 그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위의 두 길을 모두 봉쇄하면서 동시에 모두 터놓는 수법을 펼쳤다. 이것은 차별된 단계를 설정하여 착안한 풀이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설두는 이 세 방식을 제대로 행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저마다 다르게 할 일을 마친 도인 곧 무사도인(無事道人)이라 불렀다.

이 화두를 두고 불감혜근(佛鑑慧懃)은 “멀리서 산 빛을 바라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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