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직업상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도 말을 해야 하고, 또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를 위해서도 말을 해야 한다. 물론 한 사회인으로서 사적인 자리에서나 공적인 자리에서도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 것도 말하는 것에 포함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을 하다보면, 때로는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는 남으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본인 스스로 사려 깊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면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을 갖는 필자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고민이다. 말을 적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듣는 이를 가려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임시 대안은 되겠지만, 근본적인 방안은 아닌듯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내가 도달한 결론은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정확하게 언어화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오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맥락’ 속에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맥락’의 범위는 한 사람의 일생 전체를 잡을 수도 있고, 또는 한 사안에 국한해서 잡을 수도 있고, 또 일정한 시기를 잡을 수도 있다. 그러니 ‘맥락’을 달리 잡으면 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 해를 보내며 그간에 있었던 국내의 여러 일들을 보면, 참으로 많은 말들이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말로 인해 기회를 얻고도 국무총리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도 있다. 지금도 말 때문에 청와대가 시끌시끌하기도 하다. 조계종 총무원을 둘러싼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말 중에서 가장 잘못 오해되는 말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역시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 집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한문으로 된 4자성어를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읽으실까? 필자에게는 이렇게 읽힌다. ‘문자를 사용하지 말고 자신의 본성을 체험하여 깨달음을 완성시키시오!’ 여기서 말하는 ‘문자’는 구체적으로는 경율론 삼장을 지칭한다. ‘불립문자’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교외별전’이라는 말을 동시에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밖에 달리 전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뭐, 여기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경전을 읽어서는 깨침을 얻을 수 없다는 식으로 치닫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경전이란 부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읽어서, 그 내용대로 실천해야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가? 말씀을 읽기만 하고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말씀을 읽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만약 이렇게 해석한다면, ‘불립문자’라는 말이야말로 잘못 이해되는 말 중에서 으뜸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에 비교해서 불교 신도들은 ‘말씀’을 너무도 안 읽는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불립문자’라는 말에 대한 오해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불자들은 책을 너무도 안 읽는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부처님의 경전과 조사의 어록을 말한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또, 직업병이 도진다. 또 역사를 운운하려고 하니 말이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선종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승려들의 과거시험은 <선문염송>과 <경덕전등록> 속에서 출제한다. 한편 교종에 속하는 승들의 경우는 청량국사의 <화엄경소초>에서 출제한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내내 위의 책들은 지성을 갖춘 승려들에게 많이 읽혔다.

이런 독서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수행을 했다. 불조의 말씀이 담긴 책 읽기와, 그 책에서 지시하는 대로 실천하기, 이 둘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마차의 양쪽 바퀴와 같다. 어느 한 쪽만으로는 제구실을 못한다. 특히 출가 불자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 ‘불립문자’를 오해한 피해에 대해서는 일찍이 석전 박한영 장로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신규탁/논설위원,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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