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 세 번째 청정한 행〔梵行品之三〕은 세간을 아는 보살행을 들고 있다. 곧 세간인들은 불성을 알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는데 십이부경과 십이인연, 사전도와 사제, 삽십칠조도품을 듣는 일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대열반을 알아서 깨달으면 이를 ‘《열반경》의 청정행 보살’이라 한다. 보살이 세간 사람들이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청정행을 닦기 위해서는 《열반경》을 듣고 지계를 근본으로 닦아서 법을 지키고 호법하므로써 육념처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청정한 지계란 깊은 마음으로 계율을 닦아 지녀 계행이 청정해져서 교만이나 삿된 소견, 의심이 없음을 말한다. 보살은 청정한 계행을 닦고 다시 선정을 닦아야 한다. 청정한 선정을 닦아야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고 십이부경과 부처님의 상·락·아·정과 모든 보살이 대반열반경에 안주하여 불성을 보는 등의 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게 된다. 이러한 선정을 닦는 인연으로 십일공(十一空)을 얻는다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지계와 선정을 닦은 다음에는 청정한 지혜를 닦는다. 곧 나를 관하여 나 속에 몸이 있다든가, 이것이 몸이고 몸이 나라거나 내가 아니라고 하는 등의 집착을 떠남을 아는 것을 청정한 지혜를 닦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혜를 닦아야 계율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계율이 견고해져서 네 가지 전도가 없어야 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계행이 견고해져야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뉘우칠 마음이 없고, 뉘우칠 마음이 없어야 마음이 청정한 지혜는 기쁘고 안락을 얻고, 안락해지면 동요하지 않는 선정을 얻는다. 이러한 선정으로 진실하게 알고 보게 되면 생사를 싫어하고 해탈을 얻어서 불성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를 보살이 세간을 바로알고 보고 깨닫는다고 한다.

반대로 청정하지 못한 계율이란 일상적인 삶을 위하기 때문이요, 성품이 결정되지 못한 까닭이고, 구경에 이르지 못한 까닭이고, 널리 중생을 위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뉘우칠 마음이 있게 되고, 뉘우칠 마음이 있으므로 마음이 즐겁고 기쁘지 아니하며, 즐겁지 못하므로 안락하지 못하고, 안락하지 못하여 동요하지 않는 선정이 없고, 동요하지 않는 선정이 없으므로 진실하게 세간을 알고 보지 못하며, 진실하게 알고 보지 못하므로 세상을 싫어함이 없고, 세상을 싫어함이 없으므로 생사고해로부터 해탈이 없고, 해탈이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 못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열반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살의 청정한 계율 속에서는 뉘우침이 없는 마음을 내지 않고자 하더라도 뉘우침이 없는 마음이 자연히 생긴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거울을 들면 얼굴을 보려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얼굴이 나타나고, 등불을 켜면 어둠을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청정한 계율은 5법이 돕게 되고, 오온의 결박인 오개(五蓋 : 진에개·탐욕개·수면개·도회개·의개)와 오견(五見 : 신견·변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을 여의게 한다. 5법이란 믿음, 스스로 부끄러워 함[慚] 함, 남에게 부끄러워 함[愧], 선지식 계율을 공경하고 숭상함이다. 보살은 오견을 여의므로 오의(五疑 : 부처님을 의심하고, 법을 의심하고, 승가를 의심하고, 계율을 의심하고, 불방을 의심함)를 여의어 오근(五根 : 믿음·생각·정진·선정 지혜)을 얻음으로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계율의 청정을 설하므로 천태학에서는 《열반경》을 ‘부율담상교(扶律談常敎)’라고 보고 있다. 말세에는 두 종류의 둔근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여래상주의 이치에 어두어 무상한 현상을 집착한 자가 생긴다고 한다. 곧 부처님이 멸도한 뒤 여래의 입멸을 보고 “세상은 허무하고 변화무쌍하여 여래도 마침내 이 이치에 의하여 열반에 들어 아주 공적한 멸무(滅無)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가 청정하게 계를 가지고 어려운 수행을 해도 장차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막행막식하여 제일의 단멸의 견해에 빠진다. 다른 하나는 일실의 원융한 진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생사즉 열반”이라는 원교의 이치를 곡해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도록 책려하는 것은 권교의 방편일 뿐이라고 하거나, 오직 일실일 뿐인 경지에서는 선악이 평등하니 막행막식이 걸릴 것이 없다는 악평등(惡平等)의 사견에 떨어져서 중생이 곧 부처이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부처님은 이 두 근기를 위하여 법화 뒤에 다시 《열반경》을 설한 것이다.

‘부율담상교’라 한 것은 《열반경》에서 계율을 엄격히 지킬 것을 특히 경계하여 무상에만 집착한 근기들의 단멸의 사견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견의 무리들은 불성상주의 도에 바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주교의 보조적인 방법으로 부율담상이 설해진 것이다. 특히 말법시대에 막행막식하여 파계하고도 참괴하지 않는 자들이 혜명의 법신을 망실하게 되므로 계율청정을 닦는 것이다.

둘째, 계율이 청정하면 법을 호지하게 된다. 《열반경》을 수지하고 읽고 외우고 쓰고 행하려거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심하여 희롱하거나 경솔한 동작을 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삼업 25유를 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 한다. 불제자로서 《대반열반경》을 설하려하거나 불성을 설하려거나 여래의 비밀법장을 말하려는 이나 대승, 방등경전, 성문승, 벽지불승, 해탈을 말하려는 이와 불성을 보려는 이는 몸을 계율로 청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을 청정히 하므로 꾸짖는 책망이 없고, 책망이 없으므로 대열반에 들어가서 청정한 신심이 나게 하고, 신심이 나므로 이 경을 공경할 것이며, 한 게송 한 구절 한 글자를 듣거나 말하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보살이 6념처를 닦아 대법사가 된다고 한다. 6념처란 첫째 부처님을 생각하고, 둘째 법을 생각하고, 셋째 승가를 생각하고, 넷째 계율을 생각하고, 다섯째 보시를 생각하고, 여섯째 하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곧 십호의 일체종지를 갖춘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본받아 닦고, 청정한 계율과 법다운 보시와 제일의천에 이르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대법사는 법을 알고, 이치를 알고, 때를 알고, 만족함을 알고, 나를 알고, 대중을 알고, 중생들의 성품을 알고, 중도를 말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기운(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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