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법이 그러할 것이다.
-김훈의 <거리의 칼럼> ‘밥에 대한 단상’에서 인용

시사주간지 편집장까지 역임한 김훈이 사회부 기자를 맡아 사건 현장을 취재하여 화제가 된 적 있다. 위 글은 김훈 기자가 연재한 <거리의 칼럼> 중 ‘밥에 대한 단상’이다.
이 글에서 기자는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가 밥을 먹는 장면을 묘사한 뒤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해관계의 대부분은 밥그릇과 관련된 문제이다. 직장이 전쟁터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밥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일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산업화라는 시대적 과제 때문에 민주화라는 당위적 과제가 희생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잉여의 밥그릇’을 차지하려는 자본가와 ‘생존의 밥그릇’을 뺏기지 않으려는 노동자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그렇다보니 한국사회의 법은 보편성에 입각해 보면 너무 개별적이고, 개별적인 입장에서 보면 너무 보편적이었다.
정부가 밥의 보편성과 개별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그 역할은 사회단체의 몫이 된다. 언젠가부터 밥의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상이 비단 인간만은 아니게 되었다. 지율 스님의 도롱뇽 소송에서 알 수 있듯 환경문제가 불거진 뒤부터 인류의 밥그릇을 채우느라 자연구성원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생태주의가 주목받으면서부터 불교계 사회단체의 역할은 지대해졌다. 개발지상주의가 양산한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으로 불교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패산에서 천성산까지 불교계 사회단체의 손과 발이 닿지 않는 국토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러한 불교 사회단체의 활약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첫째, 불교계 사회운동의 방향성이 모호해졌고, 둘째, 불교계 사회단체들이 불교계 제도권 안으로 편입됨으로써 제 목소리를 잃어버렸고, 셋째, 불교계 사회운동의 리더십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이가 바로 도법 스님이라고 본다.

최근 도법 스님이 이끄는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가 3년간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과연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가 종단 문제에 대해 제대로 자성하고 쇄신할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돌아보건대,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는 창립 목적부터 불분명하였다.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 창립 배경이 된 것은 템플스테이 예산을 둘러싼 조계종과 정부의 마찰이었다. 조계종은 교구본사별로 민족문화 수호 결의대회를 잇달아 개최하고 민족문화수호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그 기간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정부와의 예산 협상 테이블이 다시 놓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계종이 자생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게 자성과 쇄신 5대 결사였다. 하지만 창립목적이 불분명하다보니 자성과 쇄신 결사의 결과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조계종 종책연구소인 불교사회연구소가 실시한 대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5.5%가 ‘자성과 쇄신 결사’를 모른다고 답했고, 불자들 역시 49.9%가 모른다고 답했다.

사회적 갈등의 불교적 해법을 모색하겠다며 야심차게 만든 화쟁위원회도 가시적 성과를 만들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화쟁위원회 출범 당시 도법스님은 언론 인터뷰에서 “화쟁위원회는 종단 내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에 대해 싸움을 말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집안 문제도 객관적 입장에서 잘 풀어내면 위원회에 대한 이해와 공신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문제를 제외하고는 첨예한 갈등을 빚은 종단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해왔다. 심지어 송담 스님이 탈종을 선언하고, 선학원이 결별을 선언했음에도 <법인관리법>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제주 강정마을 등 사회갈등 현안에 대해 조정 활동을 펼친 것은 고무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조정은 총무원장 개인이나 사회부의 활동으로도 충분하다.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의 주요 불사인 ‘생명평화 1,000일 릴레이 정진’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이다. 1,000일 릴레이 정진 도량의 문이 잠겨 있기 일쑤여서 교계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다.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는 “야단법석 23회, 무차대회 2회를 개최했다”고 치적(治績)처럼 주장했으나, 이 역시 연속성을 갖지 못한 불사였다.
종단 예산이 편성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의 불사들은 하나같이 전시성에 치중한 나머지 실효성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의 사업들은 추상적이기 이를 데 없어서 실적을 산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의 가장 큰 문제는 자성과 쇄신의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종단 예산이 편성되는 기구이다 보니 언론 등이 종단 집행부의 문제점들이 제기해도 결사본부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도법 스님의 행보를 보면 결사본부의 정체성이 보다 명확해진다.
최근 도법 스님은 점심 자리에서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팟캐스트 방송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과거 교계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된 불교계 도박, 성 매수, 비리 등 각종 의혹에 관한 문제를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방송을 통해 각종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분들과 해당 문제를 폭로하고 있는 분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합리적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의혹과 문제의 중심에 서있는 스님들 중 일부만 골라 입맛대로 방송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자승 스님의 룸살롱 출입의혹은 거론이 되지만 함께 갔었다고 하는 명진 스님에 대해서는 거론이 되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에 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공론을 펼치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도법 스님의 발언은 언뜻 들으면 조계종 내부 문제에 대해 ‘화쟁의 장’을 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시 숙고해보면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민주주의와 독재를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지 여부이다. 언론과 방송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전산혁명 이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은 종이 매체에서 인터넷 매체로 옮겨왔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도법 스님의 발언은 불손하다 못해 파쇼적이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함께 갔었다고 하는 명진 스님에 대해서는 거론이 되지 않고 있다”는 발언은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난다. 지위에 따라 의무와 책임은 달라진다. 명진 스님은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이 아니다. 게다가 명진 스님은 룸살롱 출입과 관련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참회하였다. 하지만 자승 스님은 이 의혹이 불거진 지 오래됐음에도 제대로 해명한 적이 없다. 도법 스님이 왜 자승 스님과 명진 스님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말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자승 스님이 34대 총무원장 후보로 나서면서부터 도법 스님은 줄곧 자승 스님을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도법 스님의 궤변은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종단 제도‧인사‧재정 등 모두 그릇과 도구에 집중을 한다. 어떻게 그릇을 만들고 누가 관리‧운영할 것인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릇을 잘 만들고 운영하면 한국불교가 희망에 가득 찰까? 불교다워질까? 생각해보면 허망하다. 바람직한 불교관‧실천관 없이 그릇에만 집중하면 알맹이가 없는 살림살이가 된다.”
대체 도법 스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바람직한 불교관과 실천관은 이미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가르침과 행장에 제시되어 있다. 그 바람직한 불교관과 실천관을 구현하자고 종단이 있는 것이다. 도법 스님의 발언은 독재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떠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도법 스님이 보기에는 종도들이 그릇에만 함몰돼 있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종도들이 보기에는 도법 스님이 밥그릇에만 함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법 스님은 15대 중앙종회에 이어 16대 중앙종회에서도 직능대표선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도법 스님은 16대 중앙종회 직능대표선출 과정에서 ‘낙선자 선출’이라는 불법적인 요소가 있는 방식으로 이암 스님을 떨어뜨리는 데 한 표를 던지기도 했다. 직능대표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되는 게 공공연한 사실인 종단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도법 스님이 굳이 직능대표선출위원까지 맡아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법 스님의 최근 행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매우 단순하다.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에서 N을 빼면 GO(governmental organization)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단체가 제도권으로 편입되면 어용관변 단체가 된다는 것이다.

하여, 필자는 도법 스님에게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화엄의 장을 펼치고 싶다면 종단 제도권 내부가 아니라 다시 길 위로 돌아가시라고.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과 스님을 존경하는 사회의 진보적 지성인들을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방하착(放下着)하실 때라고.
만약 그러고 싶지 않다면 제발 자승 스님을 비호하느라 지겨운 궤변을 늘어놓기 보다는 묵빈대처(默賓對處)하시라고.
그게 종단개혁의 주역이자 불교계 NGO의 정신적 지주였던 도법 스님의 행장에 부합하는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가 필자에게 토론을 제의해왔습니다. 이 글은 토론자 발제문을 대신하는 글임을 밝혀둡니다. 도법 스님의 반론도 기대합니다.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이 글은 불교닷컴에 기고한 칼럼으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전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