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조그만 군청에 한 과일상자가 택배로 배달됐다. 그 속에는 소방관직의 아이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현금 2억여 원이 들어있었다. 겉면에는 발신자 주소와 이름이 있었지만 모두 거짓으로 씌여진 것이었고, 심지어 돈다발을 묶은 끈에 찍힌 은행이름을 검은 펜으로 지우는 등 신분을 철저히 감추려고도 했다.

한편, 일전에 한 대권 후보자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했었다. 그는 1년 반이 지나서야 331억여 원을 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호를 따서 자금을 운영할 재단을 만들었고, 나아가 그것을 지인들로 하여금 운용하겠다고 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이를 위해 내놓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금액 차이 이외에 그런 행위를 감추고자 한다는 것과 드러내고자 한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행위이든지 무언가를 향한 집착과 탐냄이 투영되는 것을 경계한다. 보시(布施)도 예외가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그것에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행위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머무름이 없다는 말은, 곧 삼륜공적(三輪空寂) 베푸는 이와 받는 이와 베푸는 물건, 이 삼륜이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에게 얼마를 베푼다는 생각도 그에 따른 복(福)과 덕(德)을 기대하는 생각도 모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참된 베풂인 것이다.

질적(質的)으로 이보다 한 수 아래가 유주상보시이다. 곧 무언가의 기대치가 있는 보시이다. 이것은 다시 상․중․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 형태에 배대해 보면, 상품(上品)은 무언가를 베풀면서 익명이나 무기명으로 조용히 실천하는 부류이다. 하지만 아직도 행위에 대한 그림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중품(中品)은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방식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 정도 하고 그 정도 기분 내는 부류이다. 하품(下品)은 무언가를 베풀면서 온갖 생색을 다 부리고 스스로도 마음속으로 매우 뿌듯해 하는 부류이다.

앞선 두 사람의 경우는 각각 어디에 속할까?
오른손이 한 일을 그렇게까지 장황하게 왼손이 알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내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자문해본다.

법진 스님/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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