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의 법인법과 그에 따른 유관 기관의 법인등록 문제로 불교계가 한참 어수선했다. 이제는 등록할만한 단체들은 거의 다 등록을 했다는 것이 조계종총무원 측의 평가이다. 이 과정에서 재단법인 선학원의 등록 거부가 주목받기도 했고, 또 송담 선사의 조계종 탈종 선언도 적잖은 파장을 남겼다.

각 단체와 그에 소속된 사람들이 입장을 밝혔고 그에 따라 행동을 했으니, 이제는 그런 선택에 따른 제 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타협이나 계약의 재조정 등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있다. 또 그래야 한다. 사실, 법인이란 법인 설립 고유의 목적과 사업이 있는데, 이런 법인을 조계종이라는 종교단체와 연결을 시키려는 것부터가 무리수였다.

물론 삼보의 재산이 사유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대원칙을 거부하는 불자들은 없을 것이다. 이런 대원칙에 입각해 본다면, 재단법인을 만들어 사원을 관리하려했던 사람들도 그렇고, 그렇게 설립된 법인을 조계종의 유관 기관으로 만들려는 것도 대원칙에는 모두 부합한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각 단체의 설립 정신과 사업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을 눈을 의식한 반성이 아니라, 자기 단체의 현재 운영과 미래를 위한 반성 말이다.
먼저 조계종에 대해서 말해보면,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종헌에 정해진 바에 따라 불교적 이념을 실천해가야 한다. 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역사인식도 병행해야 한다. 일제의 패망과 시점을 같이하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 시대에 누적되었던 모순들이 일시에 노출되었다. 이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순을 단번에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닭이 울었다고 대뜸 날이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안들도 이런 진통의 한 과정이다.

지금의 조계종 탄생에 간화선 선 수행을 하는 당시 ‘세칭 비구’의 노력이 지대했음은 세상이 다 안다. 그렇다고 조계종이 선 중심의 교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엄교학과 간화수행과 염불정토가 솥의 세 발처럼 혼재했던 지난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지난 역사를 바탕으로, 조계종은 이 시대에 부응하는 시대정신을 창출해내야 할 것이다. 간화선 아니면 안 되겠다는 발상은 독선이다. 일부 선사들의 탈종이 그런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재단법인 선학원의 경우를 보자. 이 단체는 선 수행을 위한 도량을 잘 보존하자는 것이 설립 목적이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선 수행자들을 지원하고, 또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선학원에서 선불교를 연구하는 소장학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이념 구현의 일환이다. 또 ‘선리연구원’을 만들어 ‘선문화연구’라는 학술지를 발행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 연장선에서, 이제 부터는 간화선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이 이 단체에 넘쳐나야 할 것이다. 조계종은 복합적인 불교 이념을 구현해야겠지만, 선학원은 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선학원에 소속된 사원들이 현장에서 비록 포교와 수행을 겸하더라도, 그 핵심에는 간화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는 일을 통해서 한국불교계를 도와야 한다. 그 방안으로 전문 선 수행 도량 설치를 제안한다. 출가자를 위한 수행 공간은 물론, 재가자를 위한 선 수행 공간도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되면 명실상부하게 선학원의 재단법인 기능이 빛날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오늘의 이런 사태를 역사가들은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삼보 재산의 사유화를 막기 위한 진통의 시절이었다고 말이다. 불교 사원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그 개인이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말이다. 그 절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 공동체의 재산이다. 종단이니 또는 법인이니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제도에 불과하다. 불변하는 것은 절의 주인인 수행하는 사람공동체이다.

조계종은 요즈음 종회의원 선거로 각 교구본사들이 부산하다. 주지 임명권 내지는 추천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 쟁취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통해 주지가 사원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절에서 생긴 수입금은 무엇보다도 조계종에 소속한 승려 모두의 혜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변에 가난한 스님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신규탁/논설위원,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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