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품은 청정 범행을 설한다. 청정범행이란 범천의 도로서 범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승 열반의 청정행을 말한다. 여기서 청정범행은 세 가지에서 청정함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청정한 범행으로 칠선(七善) 사무량심(四無量心) 지계(持戒) 등 자비행으로 일체선근을 닦아서 변정(遍淨)의 모든 청정을 얻는 출세간 열반도를 말한다. 둘째는 자비의 무량한 법문으로 선근력이 발현되어 모든 부정한 것이 청정하게 됨을 말한다. 셋째는 여래의 자비로 상락아정의 범행을 닦아 대승 대열반을 얻는 청정행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청정을 갖추어 불가사의한 청정을 얻으므로 범행품이라 한다.

먼저 청정 범행으로서 칠선이란 첫째는 법을 알고, 둘째 뜻을 알며, 셋째 때를 알고, 넷째 만족함을 알며, 다섯째 스스로 알고, 여섯째 대중을 알며, 일곱째는 높고 낮음을 아는 것이라 한다.

첫째 법을 안다는 것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대승법문이 들어있는 십이부경을 잘 아는 것이다. 곧 수다라. 기야. 수기. 가타. 우타나. 니다나. 아바다나. 이제목타가. 사다가. 비불략. 아부달마. 우바제가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런 십이부경 형식으로 설해진 경전 각각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가령 가타경에는 다음과 같은 제불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여러가지 나쁜 짓 하지 않고, 여러가지 착한 일을 모두 행하라.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이를 부처님 가르침이라 한다.”

또한 니다나경에는 어떤 경이나 게송의 원인이 되는 근본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연설하는 것으로,

“작은 악을 하찮게 여겨서 죄가 없다고 하지말라.
물방울이 비록 작으나, 모이면 큰 그릇을 채우느니라.”

등 십이부경을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한다.

둘째, 뜻을 안다는 것은 온갖 경전에 들어 있는 글자와 가르침에 대하여 그 뜻을 이해하여 깨달았으면 그 뜻을 널리 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때를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닦을 때를 안다는 것이다. 곧 이런 때는 고요함을 닦을 만하고, 이런 때는 정진을 닦을 만하며, 이런 때는 선정을 닦을 만하고, 이런때는 삼보께 공양을 할 만하고, 이런 때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을 닦아서 반야바라밀을 구족할 만한 줄을 아는 것을 말한다.

넷째, 만족함을 안다는 것은 음식. 의복. 약이나, 다니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자고 일어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등 일상에서 필요한 만큼 취하고 욕심을 내지 말며 진퇴를 알아서 수행함을 말한다.

다섯째, 스스로 안다는 것은 나에게 이런 믿음, 이런 계행, 이런 기억, 이런 버림[捨], 이런 지혜, 이런 거래, 이런 바른 생각, 이런 선행, 이런 물음, 이런 대답 등이 있음을 잘 알아서 그 과부족에 따라 범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대중을 안다는 것은 찰리대중, 바라문대중, 거사대중, 사문대중 등을 잘 알아서 이 대중에게는 이렇게 가고 오고, 이렇게 앉고 일어나며, 이렇게 법을 설하고, 이렇게 묻고 답하는 줄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일곱째, 높고 낮음을 아는 것이란 사람에게는 착하고 착하지 않은 높은 행 낮은 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는 믿는 행이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행이니, 믿는 행은 착하고 믿지 않음은 착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믿는 데에도 둘이 있어서 절에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가 있으니, 가는 이가 착한 자요, 가는 자에게는 예배하는 자와 예배하지 않는 자가 있고, 예배하는 자에게도 법을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가 있고, 듣는 자에게도 지성으로 듣는 자와 지성으로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며, 지성으로 듣는 자에게도 뜻을 생각하는 자와 뜻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으며, 뜻을 생각하는 자에게도 말한대로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며, 말한대로 행하는 데에도 성문을 구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은 자와 여러 사람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을 얻게 하는 보살이 있으니 이런 보살이 가장 선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선한 법에 머물러 있을 때 청정행을 구족한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사무량심으로 청정행을 닦아야 한다. 곧 사랑하고[慈], 가엾이 여기고[悲]. 기뻐하고[喜], 버리는 것[捨] 이다. 사랑함을 닦는 데에는 세 가지 반연(攀緣)함이 있으니, 중생을 반연하고, 법을 반연하고, 반연함이 없음이다. 중생의 반연은 오온으로 말미암에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법의 반연은 중생이 필요한 물건을 주는 것이며, 반연함이 없다는 것은 여래를 반연함이니 여래는 삼계의 대도사로 제일의 기쁨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 이는 탐욕을 끊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닦는 이는 성내는 일을 끊고, 기뻐하는 마음을 닦는 이는 즐겁지 않음을 끊고, 버리는 마음을 닦는 이는 탐욕을 내고 성내는 중생을 끊는다.

또한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이익없는 일을 덜어버리므로 크게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중생에게 한량없는 이익을 주려 하므로 크게 불쌍히 여김이며, 중생에게 환희심을 내므로 기뻐함이라 하고, 내 것이라 옹호하는 생각이 없으므로 버림이라 한다. 곧 나라는 법의 모양과 내 몸을 보지 않고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자기의 즐거움을 버려 다른 이에게 버풀면 이를 크게 버림이라 한다. 이와 같이 사무량심을 늘려 육바라밀을 구족할 때 아뇩보리에 마음을 내어 무량한 출세간 마음을 얻으므로 사무량심이 청정 범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기운/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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