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학의 정의는 무엇이며, 또 그 자리는 있는 것일까? 윤후명 국민대 대학원 겸임교수는 한국불교학회 겨울 워크숍에서 ‘문학의 자리, 삶의 자리’를 통해 “불교문학을 감정적으로 고집하기 전에 부정적 견해의 근거를 냉정히 검토해 그 불합리한 점이나 결핍된 부분들을 밝혀보자”고 당부했다.

과연 불교문학은 있는 것일까? 대답은 불투명하다. 해방 이전의 문학사하면 그나마 한용운, 박한영, 양건식, 김달진, 조지훈, 서정주 등 언뜻 연상되는 인물이라도 있어 말끝을 흐려가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해방 후의 경우는 눅눅하게 들러붙은 고서처럼 좀처럼 생각이 펼쳐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문학의 범주에 걸맞은 작가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기쁜 것도 한 순간, 마음 한 쪽 구석에서 문학이면 문학이지 왜 불교문학인가, 그것은 일종의 소재주의나 호교(護敎) 문학에 대한 강변 또는 옹호가 아니냐는 질책이 손톱을 세우고 일어나 마구 달려든다.
또한 사람들은 불교문학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상습적인 불평’은 아닐까? 우리는 불교문학이란 명제를 차근차근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대상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갖추고 싶어 초조한 나머지-가령 한용운의 문학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불교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를 태우는 사람들의 순수한 강박관념처럼-미리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도 이해하기 어려운 터에 불교라니 가당치도 않다면서, 그러나 이런 태도는 풍문이나 타자의 암시에 눌리어 불교를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 당하기를 원하는 신자이며 작품을 읽기보다는 읽히기를 바라는 독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어렵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고, 즐겁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행복한 체험으로 바뀐다. 또 세상의 어떤 작가도 문학이 무엇인가를 다 알고 난 다음에 작품을 쓰지 않는다. 스님들 역시 불교가 무엇인지를 다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즐겁고 기쁘며 또한 넉넉한가. 그렇다.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순간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진리는 저기에 있다. 아무도 데려다 주지 않는다. 우리가 가는 것일 뿐.
불교문학 역시 예외는 아닐 터. 어렵다고 해서 불교문학이라는 명제를 살그머니 피해 달아날 궁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서투름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의 없음은 용서받은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바싹 다가설 때 불교문학은 자신을 둘러싼 짙은 안개를 조금씩 걷어줄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교가 소외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교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지만, 현대문학을 향해 한번 눈길을 돌려보면 사정은 상당히 달리진다. 문학작품의 내용이나 경향도 이질적이지만 불교의 투영이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하고 퇴색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문학과 불교의 관계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그 지적인 호기심의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별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교와 문학 사이에는 상당한 단절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단절은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났을까? 과연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현대문학에는 빼어난 불교문학 따위는 없으며, 김성동이나 일부 스님 작가들이 쓴 몇 편을 제외하고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거의 없는 것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우리 문학의 주체성의 확립, 전통의 발전적 계승, 서구 문학의 비판적 섭취라는 과제를 떠올릴 때마다 불교문학을 남의 손에 넘어간 선대의 땅처럼 애를 쓰며 찾아보려는 것일까?
이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들은 분명 이런 부정적 통념에 대해 상당히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마땅한 답변을 마련할 수 없어 암중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연구자들에게 불교문학이란 그냥 지나치기에는 허전하고 돌아서면 무엇인가 아쉬운, 그런 화두의 하나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화두는 불교 나아가 종교와 문학의 이율배반적 성격과 현대문학과의 원리적 모순 및 시대적 특성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욱 어둠 속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 방안의 하나는 먼저 불교문학을 감정적으로 고집하기 전에 이런 부정적 견해의 근거를 냉정히 검토해 보고 그 불합리한 점이나 결핍된 부분들을 밝혀보는 것이다. 한 빛은 한 빛 바깥에서 더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한 빛 바깥에서 한 빛을 보고, 다시 그 한 빛으로 한 빛 바깥을 보는 과정을 통해서 한국문학사에서 그늘에 가려졌던 불교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조금씩 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리=편집실
참조=윤후명 국민대 대학원 겸임교수의 ‘문학의 자리, 삶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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