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불교와 관련을 맺은 것은 이미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蛇神崇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오랜 관계만큼이나 용은 우리나라의 불교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사찰의 창건연기가 용과 관련된 것이 대단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의상대사가 동해용으로부터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얻어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기도 중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를 받고 귀국, 아홉 마리의 독룡들을 항복받고 연못을 메워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또 통도사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 있다. 개산조 자장율사를 모신 조사당으로 자장율사 영정 외에도 고려대장경 판본이 가득 차 있다. ‘해장보각’이란 이름 그대로 대장경을 바다 속 용궁에 보관해 뒀음을 의미한다.
신라고승 명랑법사는 해룡으로부터, 보양선사는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을 데리고 돌아와 금광사를, 진표율사는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고 그 권속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이처럼 용왕·용신은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나로 불법에 귀의하여 정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경전에 보면 ‘난타’와 ‘우파난타라’라는 용왕은 부처님이 태어나자 한줄기는 따뜻하고 한줄기는 차가운 청정수를 토해내 탄생불의 몸을 씻겨 줬다고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용을 불법의 수호자로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사찰의 문 앞에 세우는 당간(幢竿)을 본뜬 청동보당(靑銅寶幢)의 끝을 용두(龍頭)로 장식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서일 것이다.
한편, 용은 사찰건축이나 갖가지 불구류(佛具類)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사찰건축의 경우는 지붕의 용마루의 양끝과 추녀마루에 각각 한 개씩의 용두가 있는데, 이것은 이문 또는 치미라고 부른다. 이 이문은 용의 아홉 아들 가운데 하나로 불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찰건축 내부의 천정부에도 용 조각이 안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불구류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동종일 것이다. 동종의 상부에는 용뉴가 부착되어 있는데, 예외 없이 음통과 결부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용은 포뢰(蒲牢)라고 부른다.
용의 아홉 아들 가운데 하나인 이 포뢰는 모습이 용을 닮았으며, 소리 지르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해서 고래를 만나기만 하면 크게 운다고 한다. 지금도 고래 모양의 당(撞)으로 종을 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용뉴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용은 종에 몸을 굳게 밀착시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고려의 용은 맥이 풀린 듯 음관에 몸통을 기대고 있다. 조선초기의 종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희롱하는 모습을 띠며, 조선후기의 용은 몸체에 비해 엄청나게 큰 얼굴에 성글게 난 뻐드렁이 등이 익살스럽기만 하다.

향로(香爐)의 뚜껑에도 용을 의미하는 꼭지가 부착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모습이 사자와 흡사하며 산예라고 부른다. 용의 아홉 아들 가운데 하나인 산예는 불과 연기를 좋아하여 향로에 자주 등장한다. 이밖에도 용의 아들 중 탑비에 조각된 ‘비희’는 무거운 것 지기를 좋아하고, ‘공하’는 물을 좋아해 다리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데, 불교에서 용을 형상화 한 조각이나 그림은 용도에 따라 뚜렷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정병(淨甁)이나 향완에도 용 문양이 등장한다. 이 경우는 불교신앙 가운데 각별히 관음신앙(觀音信仰)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반야용선

흔히 법당을 중생들이 극락 갈 때 타는 배에 비유한다. 반야의 지혜에 의지해 고뇌의 차안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사찰의 벽화나 그림에서 보면 반야용선은 부처님과 탑을 싣고 있으며 극락으로 가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그 앞부분은 용의 머리로 장식해 용선을 이끄는 구실을 한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사찰의 법당은 대개 반야용선을 상징한다. 여수 흥국사는 그 대표적인 예로 기단은 바다를 상징해 거북?게?해초 등 여러 바다생물을 조각하고 정면계단 양쪽에는 용을 새겨 호위하는 형태를 취했다. 또 창녕 관룡사의 경우는 거대한 바위가 반야용선이다. 천연의 바위가 배 모양을 그대로 닮았으며, 옛 신라인들은 반야용선처럼 이곳 뱃머리 쪽에 부처님 한 분을 모셨다. 험한 물길을 부처님 모시고 맘 편히 가라는 뜻이다.

호국룡

『삼국유사』에는 용이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초월자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무수히 조각된 용도 모두 호법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호법룡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주 황룡사는 553년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黃龍)이 나타나 절로 고쳐짓는데, 이 황룡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호법룡으로 이후 자장율사에 의해 용왕의 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황룡사를 지키고 있음이 밝혀진다. 또 감은사는 죽어서라도 동해 용왕이 돼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곳으로 금당 아래에는 용으로 화현한 문무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유구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밖에 영주 부석사의 선묘설화, 울산 망해사의 처용설화 등 사찰의 창건연기에서 호국룡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용두보당(국보 136호):

금속으로 제작된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로 당간의 정상에 용두를 조각, 매우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높이 73.8㎝.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보물 6호)의 용두 :

앞을 응시하는 큰 눈과 꽉 다문 입, 뒤로 힘차게 뻗은 갈기 등 박진감 넘치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박윤경/MBC구성작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