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見一法卽如來 불견일법즉여래
方得名爲觀自在 방득명위관자재
了卽業障本來空 요즉업장본래공
未了還須償宿債 미요환수상숙채

한 법도 없음 알면 그대로 여래이며
이렇게 보는 이의 이름이 관음이라.
한 생각 깨달으면 업장이 본래 없고
미하여 못 깨치면 묵은 빚 갚게 되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바로 아시는 이가 곧 부처님이신데, 그 부처님이 이 세상을 바로 보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라고 할 것도 내 것이라 하는 없으니, 따라서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어서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여 일체의 모든 것[一切諸法]이 공한 것[諸法空相]을 밝히 보시고,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을 아시고[不見一法] 진정한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다[卽如來]는 것이니, 누구든지 무아요 무심이면 걸림 없고 크게 자유로운 활동으로 중생과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 응해주시며 이끌어 주시는 활용이 나오게 되는 것을 불러 관자재라고 한다는 것이다.

업장(業障) - 신?구?의 삼업 즉 우리들 평소의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업이며 모든 마음인 번뇌 망상이 업으로 나타날 때에 그것이 밝은 마음을 가리어 진실한 법을 보고 알아서 불도를 이루는데 장애가 된다하여 업장이라 한다.

[해제]
“한 법도 없음을 알면 그대로 여래니[不見一法卽如來]”를 선수행의 견지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참선수행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화두가 있으니 ‘이 뭣고[是甚?]’ 화두이다. 즉,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그 놈은 도대체 누구인가! 또는 그 무엇이 들어서 나로 하여금 온갖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분발케 하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자신의 참나를 바로 보게 하는 공안(公案 즉, 話頭)인데 이 화두를 오직 모르는 마음으로 의심해 쉼 없이 끌고 가다보면 결국은 ‘무(無)자’ 화두를 들고 무! 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니 마침내 주관도 객관도 대립이 무너진 전혀 공무의 세계가 앞에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참나 곧 자성(自性)의 본질인 것이니 이것을 완벽하게 깨달은 이가 부처님이기에 그것을 “한 법도 없음을 알면, 그대로 여래이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들은 특히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여래 즉,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아무리 정묘한 말을 다 하더라도 또한 온갖 학식과 지식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마치 불타는 듯한 의심덩어리와 도중에 물러서질 않는 커다란 용맹심과 끊임없는 철저하고 착실한 정진의 힘으로 나의 참 주인공을 체험적으로 확실하게 깨달아 파악함으로써 그 아무것도 없는 진실한 세계를 바로 파악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참선수행의 근본목표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러한 세계를 파악하게 되면, 이번에는 도리어 또 그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집착하게 되는 나쁜 버릇이 붙게 된다. 다시 말해서 수행 정진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집착이 바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앞세워 거기에 집착하는 것, 수행자가 빠지기 쉬운 큰 허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향상을 위해서 멈추지 않는 진실한 수행을 계속해가는 가운데 드디어 아무것도 없는 세계와 물질로 이루어진 모양 있는 현상의 세계가 전혀 다르지 않고 하나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의 이름이 관음이라[方得名爲觀自在]”고 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 여래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것인가? 한다면 사람마다의 그 속에 저마다 틀림없이 다 갖추어 지니고 있는 것이다[人人皆具如來]. 누구나 자기 자신을 착실히 진실하게 탐구해 가다 보면 이윽고 거기에는 그 아무것도 없는 공무의 세계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관자재’는 범어 Avalokites?vara를 번역하여 관자재(觀自在)?관세음(觀世音)?관음(觀音) 등으로 한 것인데,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며 관자재라 할 때는 지혜로 널리 보고 듣고하여 중생구제의 자재한 묘용을 행한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여래이다.
그 여래가 한편으로는 자유자재로운 활용을 하시니, 보려고 하면 틀림없이 제대로 바로 보시는데, 그러면 그 누구를 보고 있느냐 하면 혹은 내가 보고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만일 나란 누구인가 하고 추구해간다면 실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 또한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한 법도 없다”는 세계는 다만 관념으로써 머리로 생각되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체험으로 파악되는 사실인 것이며 그것이 곧 여래이며 그것을 불성이라고도 하며, 또는 법성?자성?본성이라고도 한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곳을 자칫 잘못하면 철학적인 관념론이 되기 쉽지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은 결코 관념론이 아니며, 수행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확실하게 파악되어지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진실한 본분의 세계에서는 각자가 모두 평등하며 완전히 자유인 것이니, 어째서 그러하냐 하면 본분의 세계란 그 속이 아주 비어있으니 구별이나 차별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의 본질 즉 본분의 세계를 확실하게 깨닫고 보면 실체라 할 것이 전혀 없으니, 따라서 자신을 괴롭히던 업장도 그 대단한 것으로만 느꼈던 죄업이라는 것도 모양도 그림자도 없어서 본래 공하여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되니, 이와 같이 깨달으면 곧 업장도 본래 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지은 죄업을 엄연히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미하여 못 깨치면 묵은 빚 갚게 된다”고 표현하였다.

飢逢王膳不能食 기봉왕선불능식
病遇醫王爭得差 병우의왕쟁득차
在欲行禪知見力 재욕행선지견력
火中生蓮終不壞 화중생연종불괴

주린데 수라상을 주어도 못 먹으니,
병든 것 의왕인들 어떻게 고칠손가.
세속에 있으면서 얻어진 선정의 힘,
불속에 연꽃 피듯 영원히 파괴 안 돼.

재욕?색욕?식욕?명예욕?수면욕의 오욕이 다 모인 세속에 살면서도, 모든 법이 공한 것임을 확실하게 깨달아 알아서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음을 자각하는 지견을 얻는다면, 욕심과 선정심이 본래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오욕의 그 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선정을 생활화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순경계나 역경계나 간에 언제나 그것들을 자유자재롭게 걸림 없이 수용하여 평상심이 달라지지 않을 때 연꽃이 불속에 있어서도 파괴되지 않음과 같아진다.

재욕행선지견력(在欲行禪知見力), 화중생연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 - 『유마경』의 ‘불도품’에 말하기를 “불속에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휘유한 일이라 할 것이니, 세속의 생활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선정을 수행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이 휘유한 일이다”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왕선(王膳) - 왕이 먹는 것 같은 호화롭고 맛있는 식사. 이것은 『법화경』‘수기품’에 말하기를, 부처님 성문제자들 가운데 사리불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에게서 직접 성불의 수기를 받는 것을 보고는 성문들도 장차 성불할 것임을 알게 되자 그들과 둘도 없는 도반인 마하목건련?수보리?마하가전연 등은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한 우리들은 그러한 자격이 없는 것인가 하고 몸부림치며 두려운 마음으로 오직 일심으로 합장하고 눈도 깜짝하지 않고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목소리를 함께하여 말하기를 “크게 용맹하신 세존, 모든 석가족 법왕이시어. 저희들 어여삐 여기사 부처님의 음성을 내리소서. 만일 저희들의 깊은 마음 아시고 수기를 주신다면 감로 뿌려 열을 식혀 청량함을 얻음과 같으리이다. 기근이 든 나라에서 와 문득 대왕의 음식 만났으니[如以甘露灑 除熱得?? 如從飢國來 忽遇大王膳] 오히려 의구심을 품어 감히 곧 먹지 못하다가 왕의 먹으라는 분부 받고서야 감히 먹듯이 저희도 그와 같아서 매양 소승의 허물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위없는 부처님 지혜 얻을지 모르다가 비록 부처님 음성으로 저희들도 성불한다는 말씀 들었으나 마음엔 오히려 근심과 두려움 품어서 감히 먹지 못함과 같사오니 만일 부처님께서 수기 주시면 그 때야 쾌히 안락 하오리다. 크게 용맹하신 세존께서 늘 세간을 편하게 하고자 하시니 원컨대 저희에게 수기를 주소서, 주린 자가 가르침을 받고 먹는 것과 같으오리다”에서 나온 말이다.

[해제]
배고픈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먹지 못하고 중한 병에 걸린 사람이 아무리 전하의 명의를 만나서 진맥을 하였더라도 그가 지어준 양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병을 고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배고프다는 것은 정신적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구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늘 어쩐지 불안하여 안정이 되지 않고 무언가를 늘 구하다 보니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이 사람 만나고 또 저 사람 만나고, 이 소리 듣고 저 소리 듣고하여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은 다 정신적으로 배고픈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설사 임금의 수라상이 나와도 먹을 줄을 모르고 보배 있는 광에 들어가도 그것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설 밖에 없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의 임금 수라상 또 보배광이라는 것은 올바른 대승의 불도를 말하는 것이며, 음식 먹거나 약을 먹는다는 것은 불도를 수행하는 것이니 불법의 법문을 듣기만 하거나 책을 보기만 하는 것은 수행을 실천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불도의 출발점은 바로 신심(信心), 즉 틀림없이 믿는 마음이 기본이며 여기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교경(遺敎經)』에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나는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병을 잘 알고 약을 쓰는 것인데, 그 약을 복용하거나 않거나 하여 병을 고치거나 못 고치거나 하는 것은 의사의 탓이 아니다” 하셨으며, 부처님께서 열심히 바른 설법을 하여도, 그대로 듣고 받들어 행하면 좋으련만, 듣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데는 어찌할 수가 없고나 하셨으니 그래서 영가 스님은 여기서 “병들어 의왕을 만난들 어찌 고칠손가[病遇醫王爭得差]” 하였던 것이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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