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이 사문전통에서 사용된 용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붇다(부처님)라는 표현 역시 다른 사문전통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불교 고유의 용어는 아니었다. 당시 수행자들의 이상적 모델을 의미하는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아라한이 ‘존경받을 만한 이’란 의미라면, 붓다는 ‘깨달은 자’란 의미이다. 아라한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만한 수행자라면 붓다는 최고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은 수행자를 가리킨다.

초기 불교에서는 붓다란 호칭을 석가모니 부처님에 한해서만 사용한다. 물론 과거불을 나타낼 때에 붓다란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들은 부처님 하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머물다 가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게 되지만, 역사성을 부여받는 분은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각자(깨달은 이)들을 붇다(부처님)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지 전통에 따라 ‘아라한’, ‘보살’, ‘선지식’등과 같은 표현으로 부를 뿐이다.
그런데, 불교라는 틀을 조금 벗어나서 불교를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불교가 인도에서 탄생할 무렵 동시대의 유력한 신흥 종교 가운데 자이나교가 있다. 자이나교의 경전 가운데 고층에 속하는『聖仙의 말씀』이라는 문헌 속에 불교와 관련된 기술이 보인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석존은 불교의 대표자가 아닐뿐더러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다. 불교의 대표자이자 붓다로 불리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석존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이다. 그 문헌에서는 사리불 붇다(부처님)로 기술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여러 논의가 가능하지만 문제를 단순화 시켜보면, 붓다라는 호칭이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가리키는 고유한 호칭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이나만이 아니다. 불교 내에서도 붓다의 원래 쓰임은 석존만을 가리키는 고유한 호칭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법구경』이나 『상응부』의 게송(시)을 보면, 붇다들(부처님들)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 전통-예를 들면 자이나와 같은-은 차치해 두고, 적어도 붓다라는 호칭이 불교 내에서는 오직 석존에게만 사용된 용어라고 하면 복수의 형태로 사용될 리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붓다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깨달은 수행자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외적인 자세에서 기인하는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열반을 앞둔 부처님에게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사후 교단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 “나는 교단의 지도자라고 생각지 않으며, 교단이 나에게 의지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단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라고 하셨다.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자세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교조화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동조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 당신을 표현했듯이, ‘길을 안내하는 자’이며, 수행자들의 ‘좋은 벗’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석존의 자세는 당신과 깨달은 제자와의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다 같은 아라한이자 붓다였던 것이다.
여하튼 초기의 불교에서는 아라한이든 붓다이든 간에 이러한 용어들이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석존에게 쓰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 경지에 다다른 수행자 일반에게 쓰였던 것임을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들은 나중에 여래의 10가지 칭호(如來十號)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경전이 결집되어 유포될 때, 경전의 첫 머리를 장식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문구가 다음의 구절이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sambuddhassa
(그 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위 구절은 남방불교 문헌인 니까-야나 논서의 가장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표현이다. 그 의미를 새삼 풀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며, 뭇 생명들의 공양을 받을 만하며, 비할 바 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께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는 모두 깨달으신 분, 곧 붓다를 의미하는 호칭들이다. 이외에도 천인사, 조어장부, 명행족 등이 여래의 열 가지 호칭이다. 이들 호칭은 부처님의 특징을 열거한 것으로 개념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호칭들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아라한이 곧 붓다이며, 세존이며, 정등각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율장(vinaya)의 대품을 보면, 불교 내에서 아라한이란 말이 언제 처음으로 쓰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다섯 비구가 깨달았을 때의 장면으로, 붓다는 그들의 깨달음에 기뻐하며,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라고 선언한다. 경전의 성립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를 한 쪽에 치워놓고 그 내용만을 본다면, 율장 대품의 기술내용이 싣닷타 태자가 붇다가 된 직후, 첫 설법의 상황을 기술한 문헌이 된다. 여하튼 이것은 부처님과 다섯 비구를 합하여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존재함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아라한의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렇듯, 아라한은 본래 부처님의 별칭임과 동시에 이상적 수행자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언제부터인가 제자들은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수행승을 붇다나 여래와 같은 호칭은 사용치 않고 아라한이란 용어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왜일까? 아라한은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가 일차적 의미이다. 이에 반해 다른 용어들은 석존의 깨달음과 지혜를 강조하거나, 혹은 특별한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석존의 제자들이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측면이 있으나, 아라한은 불멸후 승단의 리더를 나타내기에 적합한 의미와 쓰임새를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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