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있었다. 교황의 방한에 대해 가톨릭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까지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교황의 집전으로 광화문에서의 시복식도 성대히 치러졌다. 교황은 따뜻한 동네 할아버지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가까운 지인이 보내준 카톡을 들여다보니 교황은 실제 그런 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체의 ‘사치’를 쿨하게 벗어버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교황청 내 황금의자를 나무의자로 교체했고 목에 걸쳐야 했던 황금스카프도 그는 거부했다. 이전부터 신었던 낡은 검은 색 구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교황이 끼는 금반지를 은반지로 바꾸고,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십자가가 아닌 쇠로 된 십자가를 사용했다는 등의 보도도 있었다. 그리고 교황 취임 뒤, 독일의 한 대주교가 4천만 달러가 넘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교황에게 선물로 드렸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단번에 대주교를 사면하고 그 맨션을 불우 이웃과 홈리스를 돕기 위한 시설로 바꾸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본인의 차는 본인이 직접 운전하고 이왕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소리. 다른 종교인들과 달리 종교를 가지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단다. 무신론자도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면 된다고 말해, 일부 기독교인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밖의 이런 소리에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은 이념이나 종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영적 확신과 믿음이 서 있어서일 것이다. 구원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니, 바꿔 말하면 붓다께서 이르신 대로 깨달음의 열매는 자비의 실천에 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알다시피 현대에 이르러 가톨릭계에선 오래전 교회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깊은 회개와 반성도 했다. 종교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말이다. 종교가 저지른 지난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의 초석이 있어야 그 위에서 그 종교의 미래나 비전이 생기게 될 것이다. 종교의 역사는 그 종교가 담아온 몸과 같은 것. 사람의 경우로 비유하자면, 과거에 빚진 몸의 상처의 정화가 있고서야, 그의 심신이 비로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풀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중에 보인 언행을 잠시 살펴볼 때, 사실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그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모범적인’ 성직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드러나 보일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언행들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그 열광하는 에너지 속에는 우리의 종교 문화에서 비롯된 말 못할 깊은 좌절감에 대한 하나의 보상 심리가 투사된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존경할만한 영적 존재의 부재로 인해, 그리고 각자는 사랑과 영성의 빈곤을 자각하는 가운데, 누군가 참다운 존재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정화될 거란 기대감이 커서, 그런 열광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러는 마음 가난한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교황으로부터 진정한 위로와 은혜를 받으려는 소망도 있었을 것이다. 역시 사람은 경전을 통해서 보다는, 이처럼 구체적인 현장의 ‘훌륭한’ 사람(혹은 스승)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훨씬 더 소중한 영적, 정신적 소득을 얻게 되나 보다.

아마 우리 불교계도 이번 교황의 방한을 통해 교황의 행태나 언행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있음을 알게 모르게 적잖이 느꼈으리라 본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성직자란 모름지기 어깨의 힘 빼고, 말소리는 늘 낮춰야 하고, 법정 스님 말씀처럼 맑고 향기롭게 사는 도리를 몸소 행동으로 드러내야 하리라. 성직자들이 세인들과 마찬가지로 금전적 이해나 지배 관계로 다툼을 드러내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법적 소송을 일삼는 일은 영적인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참선을 통해 자성청정심을 궁구하는 자인지, 단지 구두선(口頭禪)을 말하는 자인지는 삼척동자도 그의 일상 행동으로 보아 금세 알아챌 수가 있다. 스스로 만인의 귀감이 되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또 자성을 깨쳤든 못 깨쳤든 상관이 없는 일이다. 거친 표현이긴 하나, 차라리 기독교식으로 부처님을 비롯하여 모든 불보살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 하나만을 지키며 산다면, 아마도 최소한의 언행일치가 되는 종교인은 될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신승철/시인ㆍ정신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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