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칠불통계게

1. 위험한 세상

당나라의 도림(道林, 741〜824)선사는 절강성 진망산(秦望山)의 늙은 소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과(鳥窠)선사, 혹은 작소(鵲巢)화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침 그곳 항주(杭州)의 자사로 내려온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하루는 소나무 위 스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백거이 : “스님은 너무 위험한 곳에 사십니다.”
도림 : “태수께선 더 위험한 곳에 사십니다.”
백거이 : “저야 두 다리로 땅 위에 있는데 어찌 위험하다 하십니까?”
도림 : “티끌 세상에 일진광풍 망념에 사로잡혀 사는 그대들이 더 위험하지 않겠소.”

정말로 이 대지 위가 저 높은 소나무 가지 위 보다 더 위험할까요?

▲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미라이 양민들.
1968년 3월 16일 아침 찰리 중대는 공격용 헬리콥터를 통해서 소구경 대포와 함께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군들은 가옥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하였다. 1소대는 70명에서 80명의 사람들을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미라이 4촌락에서 60명에서 70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3소대는 도피하는 ‘적’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하였다. 찰리 중대가 작전완료를 보고하자 4대대가 미케 4촌락에 도착하였으며 90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후 이틀간에 걸쳐 두 대대는 작전지역의 가옥과 우물을 파괴하였다.

“거긴 완전히 피범벅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헬리콥터 조종사, 암흑의 미라이, tru TV

베트남 전쟁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미라이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기록 중의 일부입니다. 당시 미군에 의해 살해된 미라이 주민들은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어린이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미라이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하기 45일 전인 1월 30일 밤, 설날 연휴를 노리고 베트남 곳곳에 미리 숨어 들어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일명 베트콩에 의한 대규모 기습작전이 펼쳐졌습니다. 테트공세라고도 하는 이 구정대공세에서 완전히 허를 찔린 미군은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기도 합니다. 크게 분노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베트콩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지만, 미군의 베트콩에 대한 분노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 분노와 증오가 가져온 비극 중의 하나가 미라이 양민 학살사건입니다.

“그는 45구경으로 아기를 쐈지만 빗나갔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는 서너 발자국 더 다가가 다시 총을 쐈지만 또 빗나갔다. 우리가 다시 웃어대자 그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 미라이 학살 예비 조사 보고서 , 미국회도서관

무엇이 젊은 병사들을 이런 야만적인 살육자로 만든 걸까요? 따지고 보면 베트남전쟁은 일어나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미국의 개입까지 어느 것 하나 옳은 게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가족들과 이웃들과 행복하게 살아오던 베트남인들을 프랑스는 식민지배하며 수탈하고, 그들의 독립투쟁을 억압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선언한 나라에 다시 식민통치를 하겠다고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다시 개입하는 이 모든 일련의 역사가 모조리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나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베트남에 전쟁을 확대시킨 미국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프랑스가 물러난 곳에 미국이 개입한 명분은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도미노 이론에 따라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차단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미국의 생각에 한국도 동조했고, 전투병을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지금 베트남과의 교류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이니까요. 하지만 현재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과 교역하고 있고 그 교역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 시절의 반공주의는 헛된 망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반공을 빙자한 권력에의 탐욕이요, 이를 위한 기만을 빼곤 달리 설명할 것도 빈약해 보입니다.

지나고 보면 허상에 불과한 망념들이 여전히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으려는 듯 연일 폭격을 해대고, 이스라엘을 말려야 할 미국은 흑인 폭동까지 유발하며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유럽과 일본에는 극우 전체주의 망령이 장마철에 독버섯 피어나듯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이 땅에는 좌파 빨갱이란 말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어찌 위험한 세상이 아닌가요?

2. 자본주의의 파수견

1968년 3월 20일 프랑스 파리는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대로 점령됩니다. 이 시위 중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부 사무실이 점거되고 유리창이 박살납니다. 다음날 사무실을 점거했던 학생들 모두가 집에서 체포되는데, 그 중 낭테르대학 학생도 한 명 있었습니다. 이에 낭테르대학 학생들은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프랑스 정부는 기동타격대를 앞세워 진압하였습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며 프랑스 전 대학의 궐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구호도 과격해지고 다양해집니다.

“금지를 금지하라!”
“자본을 지키는 개가 되지 않겠다!”
“삼십대 이상의 말은 결코 믿지 마라!”
“아스팔트 밑에는 해변이!”

한편 1967년 6월 독일에선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국왕의 독일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 시위에서 베를린 자유대학 학생 오네조르크가 경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숨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후 시위는 점점 격화되고, 덩달아 우익 언론에서는 이들 시위대를 좌파불순세력으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1968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백화점 두 곳이 시위대에 의해 방화됩니다. 이들은 선량한 소비자들을 맹목적인 소비 노예로 전락시키는 타락한 자본주의의 상징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 68혁명 당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전 세계를 돌아 극동의 일본까지 진동시켰습니다. 이를 68혁명이라고 합니다. 당시 세계의 젊은이들은 “불의를 외면한 채 사람들을 출신에 따라 차별하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성세대의 허위와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들이 볼 때 기성세대는 인종간, 계층간, 학벌로, 이념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며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면서도 그 잘못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폭력적으로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극단적인 생각에까지 미친 일부 과격파들은 바더 마인호프 적군파 같은 테러단체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60년대는 자유와 이상을 향한 꿈이 좌절되는 시기였습니다. 63년 케네디 대통령, 65년에는 급진 흑인운동가 말콤 X, 그리고 68년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었습니다. 이들이 꿈꾸었고 제시했던 자유는 흉탄 앞에 쓰러져 가고, 허위와 위선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케네디를 이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베트남에 확전을 결정합니다. 이후 50만이 넘는 대군이 베트남에 파병되고 그간 인류가 터트린 폭약보다 많은 폭약을 베트남에서 터트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고엽제에 네이팜탄까지, 저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것입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거짓과 위선, 전쟁과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한편에선 시위와 토론이 벌어지고 한편에선 록과 포크에 몸을 흔들며 그들의 문화공동체를 일구어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게 될 거에요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여름에는 사랑의 모임이 열릴 거에요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는
평화주의자들이 머리에 꽃을 꽂아요

68년도 당시에 전 세계 젊은이들의 애창하던 〈샌프란시스코〉라는 노래입니다. 도시이름이 성자 프란치스코를 가리켜서인지는 몰라도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반전평화주의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기성세대의 거짓과 위선을 조롱하며, 록에 열광하고, 포크를 함께 불렀습니다. 인위적 제도를 거부하며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남녀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혼숙하며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한편으로 일군의 젊은이들은 동양종교의 참선에 심취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히피(hippie)문화를 이루었고, 또 일부는 뉴에이지(New Age)운동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히피는 오래전에 사라졌습니다. 다만 당시의 히피문화를 거울삼아 그 시대를 비춰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히피들은 맨발의 허름한 옷차림에 자유와 무소유를 지향하였습니다. 이들은 기존체제가 소유를 권장하고탐욕을 정당화하며 법과 제도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하며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기존체제에 대한 당시 젊은이들의 비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자유주의 국가 미국의 위선과 탐욕이 여실히 까발려진 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 같은 거짓 사건을 조작하고, 온갖 고문과 테러, 무차별적인 폭력과 자연파괴를 일삼으면서도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오랫동안 보도통제되며 진실을 가렸습니다. 어디 베트남에서 뿐이겠습니까? 그들은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중동에서 오직 이익을 위해서 독재정권을 세우고, 지지하고, 그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압정치를 외면하였습니다.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소비사회의 노예로 만들면서도 그 해악을 고백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성세대를 향해 68년의 젊은이들은 일어났던 것입니다.

68혁명은 미완의 실패로 끝났습니다. 70년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세계는 신자유주의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었습니다. 그 후 30여 년간 엄청난 규모의 금융자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분탕질 해댔습니다. 말이 좋아 세계화고 금융 선진 기법이지, 따지고 보면 약자의 고혈을 빼먹는 짓거리들이었습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았습니다. 투기는 기본이고 노동착취와 대량 해고를 통한 이익은 고스란히 대주주와 금융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체제가 어떤 얼굴을 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서민들은 그나마 밥줄이 끊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68혁명 당시 혁명의 주역들이 현재 세계의 지도자들로 성장했는데도 말입니다.

3.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지나놓고 보면 분명해 집니다. 인류의 비극은 결국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빚어냅니다. 특히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만큼 위험한 자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내고 대결을 부추깁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며 전쟁을 불사합니다. 탐욕스런 권력과 그들이 빚어내는 증오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부화뇌동하는 무지에 의해 인류의 온갖 비극이 만들어짐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삼독(三毒)이 여전히 횡행하는 위험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거이가 다시 도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백거이 : “무엇이 도(道)입니까?
도림선사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시오.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게 곧 부처의 가르침이오.”

《법구경(法句經)》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입니다. 과거의 일곱 부처님이 한결같이 설하신 가르침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이게 어찌 불교만의 가르침이겠습니까. 모든 세계종교, 모든 스승들의 공통된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결국 세계평화는 곧 착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긴데……
요즘 이 구절을 보며 예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일곱 부처님들은 착한 일을 하라고 권고하기 전에 먼저 악을 짓지 말라고 했을까? 그저 착하게만 사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그전에 먼저 악에 대해 저항하고 거부하여야만 선이 살아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아닐까요? 그저 나 홀로 악한 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회의 악, 국가의 악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이웃에게도 알리며 함께 저항하여야만 선이 함께 이루어짐을 함축한 건 아닐까요?

먼 길을 돌아 도착한 곳은 결국 일상, 바로 지금 이곳이 곧 부처의 세계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자야 할 때 잠잔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건 아닐 겁니다. 좋은 일은 아무리 작아도 꼭 해야 하고, 나쁜 일은 아무리 하찮아도 반드시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던지는 것, 자녀들의 성적이 떨어졌다고 화내지 않는 것, 그리고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할 수 있을 때 깨달음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처음 8회로 계획했던 시리즈가 어느덧 30회까지 왔습니다. 지나고 보니 이 또한 탐욕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간 중간 미진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보완하면서 2년 6개월을 끌어왔는데, 지나친 욕심은 아니었는지…… 처음의 구상은 불교가 태동해서 완성된 이론체계를 갖추어 가는 과정을 하나의 철학적 의미로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부처의 근본교설에서 대승불교와 중국의 선종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이 모든 과정은 완성된 이론을 향한 논리적 필연임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이 여행의 끝자리에 도착해 보니 처음 출발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소박한 《아함경》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다시 소박한 그 세계로 돌아간 것입니다.

-김문갑 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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