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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자본주의는 과연 '악'으로 정의되는가?
불교평론 심포지엄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를 보고
2014년 09월 01일 (월) 09:45:00 김문갑 meastree@naver.com
과연 자본주의는 ‘악’인가?

지난 8월 29일(금) 계간 《불교평론》이 주최하는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라는 학술심포지엄이 있었다.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리였다. 심포지엄을 보며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본다.
먼저 여섯 분의 토론자 중에 다섯 분이 ‘자본주의=악’, ‘이기심, 혹은 욕망=악’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토론을 전개하였음을 상기해 본다. 과연 자본주의는 악인가? 산골 사람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지만 스스로는 생산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어촌에서 소금을 가져다가 판다면 산골사람은 기꺼이 돈을 지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직접 어촌에 가서 소금을 구해오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소금장수는 산골에 필요한 소금과 어촌에 필요한 작물을 두 곳을 오가며 장사하고 그 차익을 챙긴다. 이때 소금장수는 비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산골이나 어촌 사람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사람이 된다. 바로 고전자본주의자 애덤 스미드의 생각이다.

소금장수의 역할로 보자면

   
▲ 김문갑 충남대 연구교수
소금장수의 역할은 생필품의 매개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전국을 다니며 정보를 유통하고 여론을 조성하며, 문화를 전파하는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인도의 불교가 아시아 각국에 전파되고 중국에 들어와 화려하게 꽃핀 근저에는 실크로드라는 상인들의 길이 있었다. 상업자본주의는 문명을 전파하고 융합하며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이다.

이 모든 좋은 일들은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때로 인간의 이기심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탐욕에 물든 유럽의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남미의 잉카나 아즈텍 문명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해악을 바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자본주의를 재단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이다. 산업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이후 기계화된 자본주의 형태를 가리킨다. 기계화는 곧 대량생산체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불과 2,3백년 밖에 되지 않은 이 변화가 인류문명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최갑수 교수가 발제에서 신석기혁명까지 소급해 말하는 까닭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논의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토론이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는 문명비판을 말하는 게 된다. 문명이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하는 측면이 있지만, 자본주의에 의한 억압과는 분명 성격이 다르다.

국가의 개입 부르는 산업자본주의

왜 유독 산업자본주의가 문제인가? 산업자본주의가 가능하려면 먼저 충분한 원료와 노동력, 그리고 소비시장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 보장은 오직 국가만이 해줄 수 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필요한 교육시스템을 갖추면서 기업 활동을 도와준다.

심지어 근대 후기의 서구 열강들은 이 원료 등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까지 불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과 국가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민경국교수가 말하는 국가의 개입 없는 자유시장이란 완전한 허구이다. 심지어 시장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며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조차 국가와 기업 간의 밀착관계는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야말로 국가가 기업, 특히 거대기업에 베푸는 최대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기업,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라는 말자체가 기업, 특히 대기업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니다. 분명한 건 민 교수가 말하는 완전히 독립된 시장, 참여자들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자유경쟁하는 시장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실에 실재하는 시장은 어디나 차별적인 비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유시장주의자들 또한 자기최면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쟁이들이다.

대량생산 위해선 전쟁도 불사

오늘날 흔히 자본주의 탓으로 여겨지는 모든 문제는 산업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로부터 파생된다. 대량생산체제가 유지되려면 대량소비가 발생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한다. 사실 전쟁만큼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유발하는 좋은 수단이 없다. 못 하나에서부터 거대한 군함에 이르기까지 총동원되는 것이 전쟁이다. 한국전쟁이 전후 일본의 부흥에, 베트남전쟁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정부가 그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와의 전쟁을 밀어붙인 배경 또한 이런 요인을 무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전쟁이란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장의 요구가 포화상태에 이르러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은 스스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기업이 나설 때가 된 것이다.

당신의 옷장에는 이미 옷이 수십 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올 가을 신상품에 눈길을 돌린다. 왜 그럴까? 옷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사지 않는다면 옷 만드는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따라서 옷이 옷장에 가득 있어도 새 옷을 사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돈을 풀고, 기업은 마케팅전략을 구사한다. 광고나 드라마, 혹은 여러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구매욕망을 자극하는 건 기업의 중요한 역할이다. 유행을 좇게 만들고, 미처 유행을 따르지 못했을 때 왠지 자신이 못나 보이게 만들면서 구매욕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체제에서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이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

현대인은 이런 조작이 익숙해져 있어서 조작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소유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그가 타고 온 자동차는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고급 외제차에서부터 싸구려 중고차까지 자동차는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 혹은 인간적 매력을 담고 있는 기호가 된다. 이제 자동차는 운송수단으로써가 아니라 기호로 소비된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우리는 이렇게 기호화된 소비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물어보자. 욕망은 나쁜 것인가? 따지고 보면 욕망이 없다면 현재를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욕망은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며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다. 욕망은 삶의 에너지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 결코 나쁜 게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욕망이라고 했다. 성불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깨달음을 향한 욕망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은 바로 욕망이다.

문제는, 산업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의 체제를 위해 욕망을 통제하거나 조작하는 것이다. 대량생산체제를 위해서 대량소비가 일어나야하고, 대량소비를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투입되어야 한다. 결국 국가는 돈을 풀고, 소비자는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 자기 계발서를 읽게 하고, 유명 연사를 초빙하며 열정을 다해 일하게 만든다. 열정을 다해 일한 당신에겐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한다.

따지고 보면 그 멋진 인생이란 보다 비싼 물건을 보다 많이 소유하는 삶일 뿐인데 말이다. 여성해방이란 기치 아래 가정에 머물러 있던 여자들까지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면서 대량노동을 발생시킨다. 결국 우리는 이 산업자본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체제를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녀가 힘을 합쳐 열심히 노동하는 노예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여기게 만들다. 매우 정교한 조작시스템이다.

멋진 인생이란 허망한 망념

불교의 눈으로 볼 때 현대사회의 멋진 인생이란 허망한 망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교가 이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불교는 체제의 대안이 될 수도 없고, 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불교가 이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불교는 절대 자유와 근원적 해탈을 추구한다. 그에 비해 지배체제는 그 외형이 무엇이듯, 얼마간 자유의 억압과 욕망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즉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과 통제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 자유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불교는 결코 지배적인 질서체제가 될 수 없다. 불교는 오히려 지배체제의 모순과 허위를 비판하는 비판담론으로써의 의미가 그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대안 세력으로써 불교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전혀 불교적이지 못한 것이다. 소위 불교 공동체는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소규모로 지배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인류문명은 두 개의 힘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창조되어 왔다. 즉 지배적인 질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욕망을 통제하며 사고를 지배하려는 힘과 이에 저항하며 자유와 욕망의 해방을 추구하는 힘이 서로 충돌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문명은 전개되어 온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나 합리주의, 그리고 동양의 유교사상이 전자의 지배적인 힘을 대표한다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나 경험론, 동양의 도교는 후자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힘을 대표한다. 전자가 지배이념을, 후자는 비판담론을 형성한다. 이런 양 세력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문명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해온 것이다.

불교의 비판적 역할 절실해

불교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도 후자를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은 이미 체제에 충실한 노예로 전락하였음에도, 그런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불교 본연의 비판적 역할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더 크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불교계는 이 자본주의체제의 주인노릇을 하려 하거나, 비판의식과 저항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는 내려놓으라고 속삭일 게 아니라 먼저 돌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파사(破邪)가 불교계의 사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번의 심포지엄이 현정(顯正)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걸음이 되길 기원한다.

-철학박사 · 충남대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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