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본 실록 잔본이 귀환한 지 8년이 지나 늦었지만,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의 과정과 그 후에 남은 문제에 대해 정리해서 앞으로의 문화재 환수에 참고가 되게 하겠다”

대한불교조계종 4교구 월정사(주지·정념스님)와 동국사학회(회장·이도학)가 2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공동주최한 학술회의에서 ‘오대산 사고와 사고본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라는 주제로 배현숙 교수<사진>(계명문화대)가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 과정을 밝혔다. 

배현숙 교수가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과정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오대산본 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잔존 전주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복인한 실록의 초본(草本/校正刷)과 선조 이후 역대왕 실록의 정본이다.

융희 3(1909)년의 ‘형지안(形止案)’에 의하면 오대산사고에는 철종까지의 실록 788책, 의궤 380책, 기타 서책 2,469책 모두 3,637책이 수장되어 있었다. 이들 서책들을 모두 목제궤에 넣어 사각에 봉안해 두었는데, 목제궤인 실록궤 82, 서책궤 86, 공궤 7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대산본 실록은 관동대지진의 피해을 입어, 현재 《성종실록》(成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일부가 전래되고 있다. 오대산본 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서적 제작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어서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런 중요 자료를 일제가 침탈한 것이다.

배현숙 교수는 오대산 실록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제국대학으로 강제로 이관하였는데 그 이관 과정은 아래의 표와 같다.

국권침탈(國權侵奪) 후 사고장서(史庫藏書)의 변동(變動)

1909. 10.

궁내부(宮內府) 사무관 무라카미(村上龍佶), 평창군수와 합동으로 오대산사고 장서 조사.

1910. 4.

무라카미(村上龍佶), 무주군수와 합동으로 적상산사고 장서 조사.

내각(內閣) 서기관 이원용(李源鎔), 봉화군수와 태백산사고 장서 조사.

1910. 8.29.

한일합병(韓日合倂). 궁내부 제실도서(宮內府 帝室圖書)를 혁파하고 이왕직(李王職) 도서과(圖書課)로 개편.

규장각(奎章閣)과 사고(史庫)의 장서를 이왕직(李王職) 도서과(圖書課)에서 관장.

1911. 2.

이왕직 관장(李王職 管掌)의 도서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이관(移管)할 것 결정.

1911. 3.30.

총독부 취조국(總督府 取調局)에서 이왕직(李王職) 관장의 도서를 강제로 접수.

오대산(五臺山), 태백산(太白山), 정족산(鼎足山) 장서 이관됨.

1911. 6.19.

이왕직(李王職)은 적상산(赤裳山) 실록을 위시하여 5,519책 인계하지 않고 장서각(藏書閣) 설치.

1912. 4. 1.

총독부(總督府)는 취조국(取調局)을 폐지하고, 참사관 분실(參事官 分室)로 실록 이관.

1912.-1915.

태백산(太白山)과 오대산(五臺山) 사고(史庫)의 개별(個別) 사고장서목록 편찬(史庫藏書目錄 編纂).

1913.10.

오대산 실록(五臺山 實錄)과 장서 1,226책,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부속도서관으로 기증.

1914. 4.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서적 559부 4,136책 경중으로 운반, 사각(史閣)은 방치(放置).

1918.

정족산(鼎足山) 실록 경복궁(景福宮) 경성전(慶成殿)으로 운반하고, 사고는 철거.

1921.

규장각과 사고 장서 망라한 조선총독부고도서목록(朝鮮總督府古圖書目錄) 간행.

1922.11.

총독부 참사관 분실(總督府 參事官 分室) 관할의 장서를 학무극(學務局)으로 이관.

태백산(太白山) 사고본을 경중(京中)으로 운반하고, 사고는 방치.

1923.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설립.

1923. 9. 1.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수장의 오대산본 실록, 극히 일부 잔존.

1928.10.29.

총독부(總督府) 수장의 2,074종 9,551책을 1차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

1930.10.28.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도서관 준공.

총독부(總督府) 수장의 1,086종 15,970책을 2차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

1930.10.29.

총독부(總督府) 수장의 13,471종 136,638책을 3차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

1932. 5.28.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지진 후 소잔본 실록 27책 京城帝國大學으로 保管轉換.

이어 배교수는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는 혜문스님(봉선사)이 오대산본 실록이 약탈되었다고 인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했다.  2004년 당시 혜문스님은 교구 내 80개 사찰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953년까지 봉선사에 수장되어 있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일본에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오대산본이 동경대학에 수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대산본 실록 반환 운동을 하게 되었다.

배현숙 교수는 환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006년 1월29일 정념스님(월정사 주지)과 철안스님(봉선사 주지)이 공동의장을 맡고, 법상스님(월정사)과 혜문스님(봉선사)이 간사를 맡아 실무를 진행하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2006년 2월16일 구성했다.

 이어 3월3일 서울 견지동 조계종 총무원에서 실록환수위원회의의 공식 출범식을 가지고 일본총리 고이즈미를 수신인으로 하는 ‘반환요청서’를 전달했다. 환수위는 한일협정 체결의 결과 문화재의 반화문제와 청구권이 소멸된 상태에 상대가 부담스러운 일본 정부와 동경대인 어려운 문제를 떠맡을 일본의 변호사를 선임하였고, 또한 환수운동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방송 프로그램도 방영하고, 국내의 유력자의 협조를 받고자 모임도 조직하였다.

아울러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와 재일본거류민단의 지지와 연대도 이끌어내었다. 이와 같이 약탈문화재를 반환하라고 다각도로 동경대를 압박했다.

마침내 실록의 약탈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린 동경대는 자매대학이란 명분을 이용해 서둘러 서울대에 기증의사를 전달하면서 궁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7월14일 11시 서울대 규장각에서 실록인도인수식을 거친 후 도서대장에 등록됨으로써 실록의 귀환은 완료되었다. 93년동안 일본에 약탈되어 있던 오대산본 실록이 환수운동을 시작한 이후 4개월반만에 환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대산 실록 잔본이 모두 귀환한지 올해로 8년째이다. 실록 귀환 과정을 앞으로의 문화재 반환에 귀감으로 삼아 다시는 이와 같은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며 “한편 동경대학의 소잔본 실록은 일시에 확인된 것이 아니고 간헐적으로 발견되었으므로, 앞으로도 어디선가 잔본이 또 발견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자현스님(월정사 포교국장)이 ‘오대산 사고의 입지배경과 사명당’을, 강문식 서울대 교수가 ‘오대산 사고의 수직승도 운영’을, 서인범 동국대 교수가 ‘실록 소장처, 명조의 황사성과 조선 오대산 사고의 비교’를, 김성희 국사편찬위원회 교수가 ‘외사고의 입지선택과 오대산 사고’를, 신병주 건국대 교수가 ‘오대산 사고본의 특징과 학술적 가치’를 각각 발표했다.

-공태선 기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