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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어지는 잔인한 폭력을 보며
2014년 08월 14일 (목) 15:47:57 김문갑 meastree@naver.com

   
날이 새기가 무섭게 참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잔혹한 범죄가 꼬리를 물고 있다. 이런 극악한 현상을 접하며 우리 서민은 분노하지만 곧 무기력한 현실에 좌절하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유형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보면 이렇다.
(1)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여겨진다.
(2)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 쾌감을 가져다준다.
(3)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다.

(1)의 경우가 부처의 경지다. 부처님이 싯다르타 태자로 있을 때, 그는 세상의 온갖 쾌락을 누릴 수 있었다. 궁에는 산해진미와 절세미인들이 가득했다. 무엇하나 남부러울 게 없는 그가 성 밖으로 나가 목도한 것은 타인의 고통이다. 산 자의 고통, 늙은 자의 고통, 병든 자의 고통, 죽은 자의 고통. 싯다르타는 타인의 고통을 곧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다. 그리고 출가수행 끝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최근 이어진 참혹한 사건들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에 분노한다. 타인의 고통이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2)와 (3)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들은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쾌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처럼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나쁜 사람들일까? 그렇다. 그들은 분명 나쁜 사람들이고, 자신이 행한 악(惡)에 대해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들의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기에 본질적으로 악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지 알아내야만,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악은 우리들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게 아니다. 악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이 악을 만들어 내고 우리 안에 심어 놓는 것일까?

   
▲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라는 두 명의 일본군 장교가 100명의 목베기 경쟁을 벌였다는 기사. ― 1937년 12월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
1937년 12월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듬해 1월 철수할 때까지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지른다. 이 난징대학살로 대략 30여만 명의 중국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왼쪽 사진의 주인공은 1937년 당시 난징에 주둔하며 100명의 중국인 목베기 경쟁을 벌인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라는 두 명의 일본군 장교들이다. 이들 얼굴에는 잔인한 학살에 대한 죄의식은커녕 득의만만한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 악마의 얼굴이 저럴까?

하지만 저들도 틀림없이 불성을 갖고 태어난 중생이다. 본래부터 악마는 아니다. 다만 저들은 중국인을 벌레만도 못한 인종이라고 생각했기에 중국인 죽이는 걸 벌레 죽이는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은 일본 군국주의가 심어 놓은 인종차별주의의 산물이다. 두 일본군 장교는 일본 군국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육을 찬란한 전리품으로 여기도록 사육된 것이라고 하겠다. 어찌보면 이들도 군국주의의 희생양인지 모른다. 일본의 군국주의,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20세기 인류사에 다시없는 비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들 전체주의야말로 인류가 창조해낸 가장 괴물스런 악마임에 틀림없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처럼 인간의 의식에 특정한 이념을 불어 넣어 행동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인류역사에서 간단없이 이행되고 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은 히틀러 이상으로 잔인해져 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이름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되는 폭력이 이 시대에는 어떤 이름으로 나타나려나?

진정한 선지식이라면 불성을 더럽히고 은폐하려는 일체의 권력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권력은 절대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의 얼굴을 하거나, 혹은 성공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때론 사랑이란 이름으로, 때론 우국지사가 되어 등장할 것이다. 특히 더욱 더 은밀해지고 교묘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차별이 정당화되고 폭력이 미화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정당하지 못한 차별과 미화된 폭력에 대해 일갈할 수 있어야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식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땅의 선지식들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행여 그 분들이 먼저 자본주의의 독화살에 중독되어 같은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가?

더 이상 숨길 데가 없을 정도로 가득차서 이제는 툭툭 불거지는 게 차별이고 폭력인 사회를 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벌써 땅에 떨어졌고, 쾌락과 이익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때에 대오를 지어 길거리에 나온 저 가사장삼의 무리는 누구인가? 행여 문중의 이익이나 종파적 권력을 탐하는 무리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어 본다. 왜냐하면 스님들마저 이 추악한 한국형 자본권력의 노예로 전락하였다면 이 땅엔 미래가 없을 것만 같아서다. 세속적 권력을 탐하는 자는 결코 종교지도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 이 정당하지 못한 차별과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폭력에 맞서 용감히 나선다면 그가 바로 진정 큰스님이다. 유난히도 긴 가뭄에 단비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런 선지식이 기다려지는 오늘이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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