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에서 마등령 길을 따라 20리 남짓, 만해 한용운의 백담사는 잘 있었다…. 백담사의 지난 시절에는, 선(禪)과 시(詩)의 배를 타고 대승의 바다를 건너간 선각(先覺)이 야단법석의 사자후를 토하는 시절도 있었고, 총과 칼로 피의 바다를 건너온 아수라가 염마졸(閻魔卒)을 거느리고 관광버스 줄을 세워 야단법석을 떠는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백담사는 잘 있었다…”

시인 김하돈의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를 읽다가 이 구절을 우연히 발견했다. 1999년에 발행된 책에 실려 있는 것이라 벌써 15년이나 된 내용이지만, 우리가 지우고 싶었던 치부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역사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책에만 남지 않는 법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기억이 곧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역사가다.

이 역사가들의 눈에 오늘날 우리 절집과 스님들은 어떻게 비쳐질까? 핍박받는 사람들은 저만치 밀쳐두고 끼리끼리 어울려 쥐꼬리 만한 이해를 쫓는 자들, 가진 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자존심도 팽개친 자들, 권력에 빌붙어 알량한 지원금이라도 한 푼 더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자들, 삭발염의하고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기억하지 않을까?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황이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온다고 온 나라가 들썩인다. 전 세계인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단지 ‘교황’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외계층의 아픔을 감싸안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황의 행보는 이번 방한기간에도 이어진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용산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교황은 만날 예정이다. 그와 만나 사진을 찍고 싶어 안달하는 한국불교의 ‘지도자’들과 그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국민들은 교황을 본다. 동시에 우리를 본다. 나는 세상의 눈이 두렵다. 역사의 눈이 두렵다.

한북스님/본지편집인, 대구 보성선원 주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