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이 곧 도이다.
—마조 도일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섭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정해진 시간만큼 일 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퇴근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日常). 뭔가 허전하고, 뭔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문득문득 듭니다. 여행 가고 싶은데..... 시골에 내려가 농사지으며 살까? 세계여행을 꿈꾸고, 전원생활을 그려보지만 정작 결단을 내리지는 못합니다. 그저 짧은 휴가 시간에 잠시 맛보는 정도로 만족하며 삽니다. 우리는 왜 용기를 내지 못할까요? 아니 일상은 왜 그토록 공허한가요?

▲ 영화 《쉘 위 댄스》. 춤추는 게 나쁜 건가? 혹시 너무 좋은 것이라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건 아닌지……
영화 《쉘 위 댄스》의 주인공 스기야마(야쿠쇼 고지 분)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스물여덟에 결혼해서 서른에 딸을 낳고 마흔이 넘어 과장이 됩니다. 그리고 교외에 일부 융자를 받아 아담한 이층집도 마련하였습니다. 은퇴하기까지 이제껏 해온 것처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며 대출금을 갚아나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공허가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길에 창밖에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마이(구사가리 다미요 분)로 프로 댄서입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스기야마는 마이가 있는 댄스학원에 등록하게 되고 춤을 배웁니다. 첫사랑의 기억을 쫓듯 그렇게 시작한 춤이 스기야마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됩니다. 그는 춤을 배우며 생기가 돌고 열정을 느낍니다. 춤을 추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스기야마가 40대 중년이 되어 느꼈던 삶의 공허함은 실상 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다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어딘지도 모를 곳을 해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꿈을 잃고, 열정을 잃고 정처 없이 해매는 것입니다. 나는 집이 있고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집도 직장도 나의 정처(定處)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노승이 30여 년 전 아직 깨닫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見山是山 見水是水] 그러다가 큰스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라.[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그러나 이제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의연코 청산이요 물 또한 녹수이다.[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만일 이를 터득한 자가 있다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겠노라.”

성철스님의 말로 더 유명해진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의 산중법어입니다. 첫 단계는 상식과 과학적 인식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세계가 모두 이 세계입니다. 늘 마주하는 세계,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세계입니다.

“좋고 싫고가 어딨어? 그냥 일이니까 하는 거지.”

스기야마의 대답 속에 진실이 묻어납니다. 일이 꼭 좋아서 하는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 주어진 일이니까 하는 거지요. 사는 게 다 그러려니 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문득 허무가 찾아옵니다. “사는 게 뭔가?” “이렇게 살다 그냥 가는 건가?” 이런 물음이 불현듯 떠오를 때면 왠지 일상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더 이상 아내는 사랑스럽지 않고, 자식 또한 귀엽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아들을 라훌라(장애)라고 이름 지은 뜻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느낌. 이제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낯선 느낌이 수시로 찾아와도 그냥 묻혀 삽니다. “인생이란 으레 그런 거야.”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 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혹은 어떤 계기가 되어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합니다. 스기야마가 댄스교습소에 쓸려 들어가듯, 뭔지 모를 힘에 끌리어 다른 세계에 들어갑니다. 일상이 파괴되는 순간입니다. 수요일 하루는 댄스교습소에 가기에 평소의 퇴근 시간을 어기는 날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점점 빠져들면서 수요일 하루에 토요일이 더하고 매일매일 춤 속에서 살게 되지요. 몸은 회사에 있지만 손발이 춤을 추고, 온몸에 기분 좋은 전율이 흐릅니다. 야릇한 흥분감은 잃어버린 열정을 일깨웁니다.

스기야마는 비로소 삶의 활력을 되찾습니다. 사는 것 같고 숨 쉬는 것 같습니다. 질곡에서 벗어난 것처럼, 저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슴이 뛰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이런 해방감이 장자(莊子)가 말하는 현해(懸解)입니다. 현해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꿈을 접고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온 세월에 익숙해져 거꾸로 매달린 것도 모르며 사는 게 인생입니다. 그저 나 같지 않고, 조금 자유스럽지 못한 것도 으레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득 부자유가 좀 더 간절히 느껴질 때 일상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저 세계를 향해 용기를 내어본다면, 그리하여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일상에서 벗어나 본다면, 그 때 비로소 느껴보는 해방감이 바로 현해입니다. 스기야마가 춤추며 느끼는 해방감이 그런 것입니다.

상식이 깨지고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는 경험처럼 짜릿한 것도 없습니다. 그 희열이 어렵고 배고픈 구도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춤을 익히느랴 겪게 되는 육체적 고통이 오히려 쾌락인 것처럼 구도자는 산과 물이 부정(否定)되는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부정이 희열인 이유는 긍정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산이 산이 아닌 부정성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절대 긍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현해 ―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 바로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유신선사가 만난 큰스님은 거꾸로 매단 줄을 풀어주는 분입니다. 신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조력자이고 스승이지요.

그렇다면 훌륭한 스승을 만났거나 혹은 좋은 계기가 되어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필요가 없겠지요? 그 기쁨과 자유를 버리고 다시 스스로를 구속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스기야마의 경우에는 댄서로써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지요. 분명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길이고 삶입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여럿 봅니다. 잘 나가던 회사 때려치우고 귀농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그런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가 귀농을 하든 여행가의 인생을 살든 그 또한 되풀이 되는 일상을 살아야합니다.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직업이고 밥벌이의 수단인 한 일상은 되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거꾸로 매달려 살아야 하는 건가요?

스기야마가 댄서로써의 새 삶을 시작했는지, 본래의 성실한 직장인으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가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생을 살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일하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실한 스기야마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겠지만, 이전의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던 모습은 아닐 겁니다. 예전과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전과는 다릅니다.

유신선사의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는 신화의 서사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늘 익숙해 있는 삶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에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 12회차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리→입문→귀환’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이지요.

부처님은 싯다르타 태자로써 화려하고 평안한 세속의 삶을 버리고 거칠고 험한 구도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도 부모와 벗들에게서 벗어나 황야에 들어가 악마의 시험을 받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옵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스기야마나 모두 익숙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구도는 같습니다. 그렇다면 스기야마의 인생이 부처나 예수의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일상이 곧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산은 의연코 그 산이고 물 또한 의연코 그 물입니다. 다만 산과 물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온갖 풍상을 겪은 후에 마침내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후에도 그는 여전히 뱃사공으로 살아가지만 그가 늘 대하는 강물은 예전의 강물이 아닙니다. 그는 온전히 강물과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산과 강은 그대로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2. 평상심이 도이니라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시인은 서울을 떠나 충청도 여러 고을을 여행합니다. 아마도 그날 시인은 사모님과 부부싸움을 하였거나, 자식들이 짐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분명한 건 이 여행이 시인의 일상은 아닙니다. 일탈이고 비일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일탈에서 시인이 만난 나무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도승이고 과객이고 파수병입니다. 나무가 나무가 아닌 경험을 하고 시인은 서울로 돌아옵니다. 비일상적 경험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무는 그 나무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푸른 나무가 되어 시인의 마음속에서 자랍니다.
M. 엘리아데라는 종교학자는 이런 일상과 비일상의 경험을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으로 해명하였습니다. 성스러움과 속됨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경험하는 양태가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예컨대 축제는 일상적인 게 아닙니다. 일 년에 한번 있는 축제 기간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나와 우주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삼매경에 푹 빠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일년 열두 달이 모두 축제일 수는 없습니다. 축제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상을 축제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요?

마조도일(馬組道一, 709~788)은 늘 “평상심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가르쳤습니다. 도일로부터 비롯한 이 선풍이야말로 진정 대승불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곧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꿈을 꾸고 누구나 가 보고 싶은 저 세계. 그 피안(彼岸)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 곳 일상 속에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마조도일의 법맥을 잇는 장사경잠(長沙景岑, 788~868)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졸리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더우면 부채질하고 추우면 불 쬐지.”

먹고 마시는 일상이 곧 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 자는 이 모든 삶이 곧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피안(彼岸)은 멀리 강 건너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성속불이(聖俗不二), 색즉시공(色卽是空)이 일상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선종이 위대한 것은 일상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를 연 것입니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구상했던 세속 그대로가 곧 진리의 세계임을, 그래서 굳이 세속을 떠나지 않고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를 중국의 선사들은 바로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먹고 자고 싸는 일상 하나하나가 곧 삼매 아닌 게 없는 경지.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집에 돌아와 쉬는 일상 모두가 마치 축제와도 같은 세상.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가 시인이 되어 시인의 눈으로 본다면 나무와 이야기하고 우주가 춤을 추는 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결코 어려운 건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니까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의 말마따나 흔들리는 건 내 마음이니, 한번쯤 용기를 내어 마음 흔들리는 대로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김문갑 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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