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든 일은 사람의 몸을 통해 이뤄진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렇다. 사람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손과 발을 쓰게 된다. 기상천외하고 천문학적인 가격의 군사무기가 만들어져도, 결국 고지를 마지막에 점령하는 것은 보병의 두 발이다. 발이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일은 걷는 것이다. 오죽하면 “걸어야 산다”는 말조차 있을까.

여럿이 함께 무리지어 걷는 것을 행군이라고 한다. 성인이 보통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10리 정도다.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4km정도 되는 거리다. 대동여지도에서는 10리를 4.2km로 봤다. 그러니 100리는 40km 내외가 된다. 행군에서 100리는 상징적인 거리다. 훈련소 마지막 주차의 행군거리가 100리이고, 유격훈련에도 100리 행군이 포함된다. 마라톤 경주 구간도 100리 정도다. 100리는 단순히 공간적인 거리가 아니라 염원을 담은 거리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보병의 평균적인 행군 속도는 하루 최대 30리였다고 한다. 그 이상으로 행군속도를 높이면 낙오병이 생기고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사의 피로가 심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행군속도는 하루 22km였고,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 기병군의 행군속도는 하루에 무려 134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라군의 행군과 군수: 황산벌 전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이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백제정벌에 나섰을 당시 신라군은 황산벌까지 총 22일을 행군했고, 790리 약 354.8km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신라군의 하루 평균 행군속도는 16.12km였다. 시간당으로 계산하면 2.3km가 된다.

아이들이 1박 2일 동안 100리를 걸었다. 38명이 대열을 이루었다. 그들은 진도 앞바다에서 “가만있어라”는 말을 듣지 않아서 겨우 살아남았다. 대열은 2014년 7월15일 오후 5시41분에 학교 정문을 나섰다. 대열의 선두에는 “우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 진실을 밝혀주세요”라고 적힌 노란 만장(輓章)을 앞세웠다. 한 학생이 말했다. “친구들한테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에 이렇게 나섰습니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려고 뒤따랐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들이 다시 등교하던 날, 주인 없는 책상 위에 놓인 하얀 국화꽃은 시들어 있었다. 교실 한편에는 핫팩과 빵, 우유 등이 소복이 쌓였다. "주희랑 해주랑 나눠먹어. 보고 싶다", "선생님께 맛있는 것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이 커피 아직 시원해요", "거긴 춥지, 핫팩으로 따뜻하게 있어……".

대열을 이룬 학생들은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의 이름표를 가방에 매달고 걸었다. 'Remember 0416', '보고 싶은 친구들아 사랑해', '얘들아 힘내' 등의 문구가 쓰인 노란 깃발을 손에 들었다. 대열은 오후 7시에 안산 부곡동 하늘공원에 있는 안산시립납골당에 도착했다. 바다로 떠난 103명의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자정 즈음에 대열은 불어났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 5명이 추가로 참여했다. 시민 80여 명도 학생들과 함께 걸었다. 16일 새벽 2시가 다 되어서 경기 광명의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에 도착해서 눈을 붙였다. 16일 낮에 대열은 6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2시50분경 여의도 공원에 들어섰고, 3시18분경에 국회 정문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학교 정문을 나선지 22시간 만이었고, 40km에 가까운 거리를 걸었다. 옛날 보병보다 더 많이 걸었고, 현대 정규군의 훈련용 행군거리와 맞먹는 거리를 걸었다.

아이들의 물결이 국회 앞마당을 밀물처럼 노랗게 적셨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바다를 향해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빌었던 눈길로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또 빌었다. 아이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았고 고함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울타리에 노란 깃발을 걸었다. 바다처럼 묵묵부답인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다가 그들은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학생들이 떠난 자리엔 노란 꽃잎이 남았다. 노란 꽃잎 위에서 고성이 오갔다. 유가족들과 경찰이 국회 정문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유가족은 국회로 진입하려고 했고, 경찰은 막아섰다. 유가족 3명이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하늘도 말이 없었다.

옛날 깊은 산 속 암자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다. 그는 30년 동안 오직 사기 접시 하나만 썼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걸 깨뜨렸다. 스님이 매일 사기 접시를 찾으니, 그 사람이 이러 저리 수소문해서 그렇게 생긴 것을 구해왔다. 하지만 스님은 받는 대로 모두 던져버리면서 말했다. “이런 것을 바란 게 아니다. 내 본래의 것을 달라!”

《선문염송》이라는 책에서 보이는 사분(砂盆)이라는 제목의 화두다. 언뜻 보면 스님이 괜히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 접시나 있으면 되지 엉뚱하게 생트집을 잡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아무 접시나…” 라는 생각이 바로 무지막지한 야만이고 폭력이다. “내 본래의 것을 달라”는 말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의식을 꾸짖는 발언이다.

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에 따르면 사람은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를 필요로 한다. 그 통로는 아이일 때는 엄마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곰 인형이나 옷 그리고 친구가 된다. 실물뿐만 아니라 종교나 이데올로기, 가치관도 대상이 된다. 어른이 된 후에도 사람은 대상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 대상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삶을 살아내도록 하는 힘이다.

프로이드(Freud)는 사람의 본능적인 에너지는 어머니, 아버지, 친구 등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즉 정신적인 표상인 ‘대상’에 투입된다고 말한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이러한 에너지의 투입은 한 개인이 자아의 구조를 형성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 대상이 훼손당하면 당사자에게는 내가 무너지는 것이고 또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대상은 신의 표상(god-representation)이다.

오래 가지고 놀고 함께 이불을 덮고 잤던 눈알 빠진 곰 인형, 세상 떠난 어미가 유품으로 남긴 쌍가락지, 아들이 처음 월급 받아 사준 빨간 내복, 이런 것들이 모두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는 ‘대상’이다. 새로 산 곰 인형이나 물방울 다이아몬드 박힌 반지, 고어텍스 내복이 이것을 대신하지 못한다.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들을 두고 보상금 지급, 특례입학, 의사자 지정 얘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야만스럽다.
아이들은 “아무 접시나…” 던져주려는 어른들의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고 있다. “친구를 살려내라”는 목소리는 억지처럼 들린다. 그 목소리가 억지처럼 들리면 내 의식이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것이다. “친구를 살려내라”는 말은, “억울한 죽음 진실을 밝혀주세요”와 같은 말이다. 죽음의 진실이 밝혀져야 아이들의 대상관계는 마음속에서 겨우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볼 것인지, 단순 사고사처럼 볼 것인지는 제3자가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대상관계를 맺었던 당사자가 억울하다고 여기면, 그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다. 그리고 제3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그저 단순 사고사일 뿐이었다고 우길 일이 아니다.

박재현/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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