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영상 사무국장.
“임해군의 아들 일연상인은 조선인으로서 일본 일련법화종 고승의 반열에 올라선 인물로 한일 관계에 대한 시사점이 크다.”

‘임란 호란 전후의 사회상과 불교상’을 주제로 27일 남양주 봉인사 지장전에서 열린 광해군 추선 기념 제6차 학술세미나 및 한국불교사연구소 제8차 집중세미나에서 원영상 사무국장(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일연상인의 일생을 조명했다.

일연상인에 대한 연구는 2002년 제1회 한국불교학결집대회에서 양은용 명예교수(원광대)가 처음 발표한 이래 그 연구를 잇는 후속 연구격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는 임해군의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본의 기록인 《가토 키요마사 전》과 <조선국 양왕자등 연서서장>에 임해군 순화군 부부와 관인 도합 200여인을 생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자녀에 대한 부분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일연상인이 창건한 후쿠오카 소재 향정사의 <향정사 연기>에 ‘일연상인은 고려국왕 이연왕의 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형 왕자 임해군은 두 자녀 자제를 키요마사 공에서 맡기고 일본에 돌아왔다고 한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원 사무국장은 “일연상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지만 한일 불교사의 입장에서 전쟁이라는 참화를 넘어 불교정신을 통한 국가 간의 화해와 화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뿐만 아니라 왕실 후손으로 굴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가 불교에 입문해 보여준 고준(高峻)한 정신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인 인간정신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발표에 따르면 일연상인의 일생은 세 단계의 굴곡을 보인다. 첫째 임해군의 자녀로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 둘째 일본 내에서 출가해 수학하고 승려로 활동하는 과정, 셋째 일련법화종 내에서 일어난 신지대론의 결과, 유배를 자청한 후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이다.

“1593년 일본으로 이송된 일연상인은 열렬한 《법화경》 신앙인인 가토 키요마사의 후견 아래 승려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고 설명한 원 사무국장은 “법성사에서 출가해 관동에서 활약하다가 30세 전후 일련법화종의 종조 일련성인 탄생지가 있는 탄생사 제18대 법통을 계승하는 한편 용잠사를 개창했다”고 설명했다.

원 사무국장은 “일연상인은 왕손의 신분이라고 하는 태생과 일련종과의 불연을 통해 더욱 깊은 종교적 세계에 침잠했을 것으로 본다”며 “근세 한 국가의 침략으로 수난을 짊어지게 된 비극적인 개인의 삶이지만, 일연상인의 사상적 궤적은 오늘날에도 불교, 더 나아가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묻고 있다”고 정리했다.

▲ 지난 27일 남양주 봉인사에서 ‘임란 호란 전후의 사회상과 불교상’을 주제로 광해군 추선 기념 제6차 학술세미나 및 한국불교사연구소 제8차 집중세미나가 열렸다.

논평에 나선 윤기엽씨(연세대)는 “일연상인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이나 해외진출 그리고 한일불교 교류를 논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며 “유아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일본으로 성장하고 출가해 생을 마감한 만큼 그의 활동 속에 한국불교와 접촉한 행적이나 교류 사실은 아직 찾지 못했고, 한국불교에 영향을 준 내용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황인규 교수(동국대 역사교육과)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는 ‘광해군의 대동법 시행과 수취체계의 변화’ ‘임란 호란 전후 승역의 실제’ ‘조선후기 승려의 행장기술과 비문조성’이 발표됐다.

-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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