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만해는 석전이라는 영혼의 도반이 있어 《님의 침묵》이라는 ‘늦은 봄의 꽃수풀’에 핀 ‘황금의 꽃’을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피울 수 있었는지 모른다.”

25일 오후 2시 《유심》 사무실에서 만해학회의 주관으로 열린 만해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만해와 근대 지성의 교류’에서 ‘만해 한용운과 석전 박한영, 그 영혼의 도반’ 주제 논문에서 고재석 교수(동국대)는 이렇게 주장했다.

“박한영스님은 만해의 가슴 속에 머물고 있는 영혼의 도반, 아니 밝은 달”이라고 강조한 고 교수는 “한영스님은 만해스님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일으켜 종지수호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영스님과 육당의 인연 또한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해준다. “문화적 양산박 또는 조선의 아카데미아로 불리는 조선광문회의 젊은 주인 육당의 손을 붙잡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간산지법(看山之法)과 간문지법(看文之法)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일깨워준 스승”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상으로 하는 시서화 겸수의 문인 취미나 서화골동을 애완(愛玩)하는 문인풍의 생활풍정에 냉담했던 ‘서화 배척당’ 만해를 돈의동의 여박암으로 이끌어 위창 오세창(1864~1953)이 가전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1천200년의 세월에 걸친 1천291인의 고서화를 함께 보면서 새로운 심미안의 개안을 도왔다”고 설명한 고 교수는 “이날의 심미적 충격으로 만해는 〈고서화의 삼일〉(〈매일신보 1916.12.7.~15. 총 5회)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정선강의 채근담》과 불교 종합교양지 《유심》(1918.9~12. 총 3호)을 간행하면서 세속적 지식인 사회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강조했다. 이 여박암에서의 인연은 ‘3.1 독립운동에 불교계 대표 참여’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한영스님과 만해스님의 성향이 같았던 것은 아니다. 고 교수는 “만해와 석전의 현실 대처 방식과 개성 및 운명의 형식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며 “만해가 ‘의인 걸사’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불교계에서 찾고 일종의 정치적 선택으로 1904년에 출가를 감행했다면, 석전은 사노 젠레이(1859~1912)가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를 완화해달라는 건백서를 김홍집 내각에 제출하고 공식적으로 해금칙허를 얻언 후 1888년 출가하면서 조선불교계의 환골탈태를 꿈꾸었다”고 지적했다.

고 교수는 마지막으로 “‘시벽(詩癖; 시 짓기를 좋아하는 버릇)’과 ‘성병(聲病)’에 단단히 들린 만해가 선승과 혁명가, 시인으로 전신할 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주었던 지인 석전이 보여준 삶의 위의와 시선일규의 시학은 한국시문학의 시격을 높이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투명한 유산이자 또 다른 원천으로 만해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을 기다려 되살려지고 재창조되었다”고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이날 세미나는 1부 ‘만해와 심우장’을 주제로 한 1부에서는 ‘만해와 심우장의 정신사’를 주제로 김광식 특임교수(동국대)가 발표를,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가 토론을 맡는다.

‘만해와 근대 지성과의 교류’를 주제로 열리는 2부에서는 ‘시적 상상력과 독립운동’을 주제로 서승석 전 겸임교수(서울대)가 발표를, 박현수 교수(경북대)가 토론을, ‘만해와 계초:신문연재소설 속 말하기’를 주제로 조미숙 교수(건국대)가 발표를, 박성건 대우교수(성균관대)가 토론을, ‘만해와 지훈’을 주제로 이선이 교수(경희대)가 발표를, 오태환 강사(고려대)가 토론을 각각 맡을 예정이다.

-강지연 기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