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부천 소사본당에서 수행하던 스승, 도반들과 함께. 왼쪽부터 이선우, 백성욱, 남창우, 김동규.

나는 조부모와 고모, 아버지까지 열댓 명의 대식구가 모여 살던 시골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특별한 종교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려서는 불교와는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다만 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홍성의 절에 가끔 갔던 기억은 난다. 수학여행으로 자주 수덕사를 찾아가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일엽스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땐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절이, 스님이 좋았다.

인생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있던 나는 가족 그 누구에게도 그 괴로움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삶의 고민을 짊어지고 가출을 했다. 서울에서 친척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조계사로 발길이 닿았다. 몇 달을 조계사에서 보냈다.

조계사에서 기도 정진을 했지만 내가 가진 문제들은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당시 무진장 스님과 친분이 있었는데, 스님이 동국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는데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

1966년 즈음이다. 9월1일에 출가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신변정리를 하고 있었다. 출가를 앞두고 친척집에서 머물렀다. 그날 꿈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툇마루에 앉은 신사가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마에 커다란 점이 마치 백호처럼 보이는 신사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 꿈에 나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날 김재웅씨라고 친구를 만났다. 나중에 포항 금강경독송회를 이끌던 사람이다.

중앙극장 앞에서 고행하다시피 돈을 벌어 여동생 학비를 대던 부지런한 이인데, 출가하겠다고 인사를 하며 꿈 이야기를 해주니 바로 백 박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몇 년을 공부하고 있었다는데 나한테는 생전 말을 해주지 않더니, 꿈 이야기에 바로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 백성욱 박사.
소사에서 도장을 열어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한번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 길로 소사로 찾아갔다. 동네 맨 위 한적한 곳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쓰인 문패가 달린 집이 보였다. 문을 두드리니 “누구얏!”하고 부엌서 나오셨는데 꿈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뭐하러 왔어요?”하고 물어보시는데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했더니 바빠서 안 된다고 너 같은 사람 만나줄 시간이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조계사에서 지낼 때는 스님께 3배를 하고 인사를 올리면 스님들은 모두 반갑게 반겨주셨다. 선생님처럼 저렇게 매몰차게 대하는 분은 없었다. 돌아 나오는데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다.

삼배를 올리니 절을 받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도 발원을 해주신다. 선생님을 찾아가면서 질문 세 가지를 품고 갔다. 어떡하면 삼라만상 가운데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북통일이 되어 불국토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막상 삼배를 하고 마주 앉으니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질문을 만들어온 것은 기억이 났는데, “누구얏!”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질문 내용은 다 잊어버린 거다.

마치 맞은 것처럼 온 몸이 노곤했다. 아마 호법신장이 내 자만을 질타하며 후려친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출가자와 재가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왜 튀어나온 질문인지도 몰랐다. 갑작스런 질문에 선생님은 “출가자는 생각이 부처를 향하고, 재가자는 생각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차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이 얼마나 간결한 설명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앉아 있다가 또 할 말이 없어 “가겠습니다” 하니 선생님이 앉으라하시곤 금강경 강의를 30분 해주셨다. 그리고 나서야 가라고 하셔 3배를 하고 나오다가 선생님께 “한 달에 한두 번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금강경만 읽으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주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렇게 매몰차던 분이 말이다. 그때 든 느낌이 ‘아, 이게 선지식을 만나는 절차구나’하는 생각이었다. 덕산스님의 방, 조주스님의 할처럼.

▲ 백성욱 박사.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신묘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수행자, 정치가, 교육행정가의 삶을 사셨다. 1917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해 학생 신분으로 3.1 만세운동에 동참했던 선생님은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하다가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을 했다. 프랑스와 독일 유학을 떠나 철학박사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불교학 1호 박사이다. 광복 후 건국운동에 참여한 선생님은 대한민국 제4대 내무부장관, 동국대 제2대 총장을 역임했다.

소사로 한 달에 한번 찾아뵙던 것이, 일주일에 한번이 되고 결국 아예 들어가 살았다. 선생님은 안쪽 방에서, 우리는 바깥방에서 방석 하나 깔고 참선을 하며 살았다. 물론 수행만 한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혼자 계셨다. 그 집에는 우사가 있어 소를 여섯 마리 키우고 있었다. 우사 안에 숙직실 같은 방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머물렀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냄새 또한 말도 못했다. 나중에는 면역이 되었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에도 떠날 생각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늘 참선만 할 수는 없었기에 선생님은 평소에는 미륵존여래불을 가르치셨다. 일상에서 항상 외며 걸을 때도, 일을 할 때도 미륵존여래불을 외우라 하셨다.

소사에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농기구로 산을 개간하고, 아침에는 소젖을 짜는 것이 일과였다. 해보지 않은 농사로 손등이 다 팅팅 부었다. 소젖을 짜다가 꼬리에 맞거나 뒷발질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화가 나서 소를 때리기라도 하면 선생님은 그걸 다 아셨는지 혼을 내셨다.

선생님과 함께 살면서 상식적으로 이해 못할, 신기한 일이 많았다.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으셨다. 비오는 날이라야 나도 쉴 수 있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 세시쯤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은 먹지 않고 물만 먹었다. 한 보름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고생이 많았다.

이런 고된 삶은 스님들도 버티지 못했다. 선생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님들도 일이 고되니 하루 이틀 넘기지를 못하고 떠나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우리가 복을 지은 것이 없어서 몸으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복과 혜가 겸해져야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선생님은 모든 일어나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이미 열반하신 부처님은 형체가 없으니 밝은 우주의 광명으로 몸을 보이신다고 했다.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중신이 들어왔다. 한때 출가를 생각했던 나였기에 중신은 버거웠다. 선생님을 찾아갔다. 방에서 참선을 하고 계셨다. 절을 하고 “서울 구경을 가겠습니다”하고 나왔다. 나오니 어디 갈 데가 있나. 친척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목동 노릇을 하고 살았으니 옷도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허름한 꼴을 보고 친구가 옷을 줬다. 얻어 입고, 얻어먹으며 지냈다. 그러다 친구 하나가 퇴계로에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갔다가 친구어머니를 만났다. 선생님께 가서 공부를 하는 분이셨다. 친구어머니는 백 선생님이 오라하셨다며 나를 꼭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얼른 돌아갔다. 그렇게 중신에 얽힌 나의 방황은 끝이 났다. 돌아가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앉혀놓고 중신이 들어온 여성과 과거 중국에서부터 인연관계를 쭉 설명해주셨다. 그러면서 “장모하고 집사람이 널 따라다니는데 도망 다니기만 하면 언제 해탈하느냐?”고 물으셨다. 실제 생활, 행위 속에서 해탈하는 것이지, 속세를 떠나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씀에 그대로 결혼준비가 진행됐다.

5.16이 나고 자유당 때 장관을 지냈던 선생님은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그 후로 소사로 들어가 외출 한 번 하지 않으시던 분이 서울에서 열린 내 결혼식에는 참석하셨다. 그만큼 선생님은 나를 아껴주셨다. 6월6일 현충일에 결혼을 했는데 선생님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영광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접살림은 노량진에 차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살던 집인데 200여 평 규모의 집이었다. 나는 별채서 공부를 하며 지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너희 집 가서 《금강경》 강의를 해야겠다”시며 100일 동안 《금강경》 강의를 해주셨다. 방이며 거실까지 실내에 한 6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는데, 사람이 워낙 몰려와 마당에 스피커를 연결해 마당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가 선생님이 일흔 하나쯤 되셨을 때다.

▲ 김동규 (사)금강경독송회 이사장.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집에서 이렇게 강의를 해주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것이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가 됐다. 이후 선생님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소사를 떠나 서울로 오셨다. 아현동과 동부이촌동에서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셨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아뵈면 참 반가이 반겨주셨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분이셨다. 숙명통이 터져 모든 걸 훤히 보고 계셨던 분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마음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금강경》이라며 우리에게 열심히 강의해주셨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선생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 잘 가르치고, 가는 사람 잡지마라, 인연에 따라 가르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대로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금강경》 강의를 한다. 요즘도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강의를 하는데 금강경독송회 회원들은 수는 적어도 공부는 영글어 있는 이가 많다. 그렇게 후학들은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다.

-김동규 이사장 (사)금강경독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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