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보이고 들리는 대로 사람은 생각하게끔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텔레비전 화면 상단에 탑승/사망/실종/구조’로 구분된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화면을 볼 때마다, “아, 사람이란 기어이 이러한 것이구나.…” 싶었다. 물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두고 야구중계에서 ‘스트라이크/볼/아웃’을 표기하듯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구조’라는 두 글자가 거기에 왜 끼어들어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생존’이나 ‘생환’이라고 적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맨 처음 ‘구조’라는 항목을 만들어낸 사람의 머릿속을 짐작해보다가 마음이 사나워져 그만두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기막힌 명언이 있다. 말이나 글자는 그것을 듣거나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강아지를 사와서 ‘또로로’라고 이름 붙이고 나면, ‘또로로’는 세상의 강아지들과 분리된 별도의 존재가 된다. 이름 붙이기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어떤 것을 갈라 세워서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방식이다. ‘빨갱이’라고 말하면 빨갱이로 분류되는 존재가 생긴다. ‘꼴통’이라고 말하면, 꼴통으로 분류되는 존재가 생긴다.

문제는, 부르는 게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부르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일단 부르면 나면, 그렇게 불린 사람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바다에서 살아나온 사람을 두고, 혹자는 ‘구조’라고 말하고 혹자는 ‘탈출’이라고 말한다.

구조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난 따위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라고 되어 있다. ‘자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을 때 구해내는 것을 구조라고 한다. 매몰된 인부나 적진에 낙오한 병사 혹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사람을 구해내는 게 구조다. 진도 앞바다에서 탈출하거나 생환한 사람들을 ‘구조’라는 항목으로 분류한 누군가는,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을 것이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은 학교 조회시간에 한 번씩 들었던 훈화 말씀이다. 이름과 실상이 서로 들어맞아야 한다는 뜻이니, 말은 장하되 행하기는 어려운 주문이다. 그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공자(孔子)의 정명(正名)과 만난다. 정명은 명칭을 올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물었다. “선생님께서 정치를 맡게 된다면 장차 무엇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정명이었다. 공자는 덧붙였다. “명칭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말(言)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거나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 하는 것 같은 일을 비일비재하게 본다. 명실상부 하지 못한 것이다.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운전대 잡은 사람 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굳이 반대쪽 깜빡이를 켰을까 하는 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신호는 곧 언어다. 신호를 보내는 이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내고 싶은 거다. 깜빡이 불빛만 보고, “그리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이미 지는 거다.

선불교의 구호 가운데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있다. 이 말 때문에 선불교의 수행법인 공안이나 선문답을 두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을 넘어 비이성과 직관의 영역으로 전환하도록 교묘하게 디자인 된 일종의 심리적 기술(psychological technique)처럼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선(禪)의 지향점은 언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not free from language) 언어에 자유로운 것(free in language)이다. 바로 이 지점이 뿌리치기 어려운 선(禪)의 매혹이다. 여기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냐.”
“빗방울 소리입니다.”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자기를 잃고 대상을 따르는구나.”

스승이 제자에게 또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냐.”
“파초 위에 빗방울 소리입니다.”
“여래(如來)의 바른 법(法)을 비방하지 마라.”

스승이 문 밖에서 나는 소리의 정체를 묻는다. 제자는 빗방울 소리라고 대답한다. 스승의 반응은 “그래 알았다”가 아니다. 오히려 꾸중하는 형식으로 되돌아온다. 제자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뭐냐고 물어서, 빗방울 소리라고 대답했으니 잘못된 게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제자는 “그러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했어야 하지?” 하고 속으로 되물었을 것이다.

이 대화를 보고 제자가 대답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스승이 생각하는 다른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뭐라고 대답했어야 할까 생각하면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런 생각조차 안하면 그것 또한 문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선문답은 철저히 교수법(敎授法)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교수법의 핵심은 정보전달이 아니다. 정답을 가르치는 게 교육이 아니다. ‘2+2=4’라는 하나의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덧셈의 원리를 알도록 해서 어떤 덧셈이든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우는 게 목표다. 셈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1에서 100까지 숫자의 합을 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1에서 100까지 순서대로 무작정 더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다른 방식도 많다.

학생이 자기 나름의 방식을 스스로 개발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게 교수법이다. 자기 나름의 방식을 개발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기존의 방법을 철저히 익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철저히 익힌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기존의 것에 매몰되어 있으면 새로운 것이 움트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동차가 간다”고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는 한, 작가는 될 수 없다. 작가는 “자동차가 간다”고 써놓고서, “이건 아닌데…” 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다르게 쓰지 않으면 도저히 상황을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자기 나름의 표현방식이 도출된다. 그 때 작품이 되고, 예술이 된다.

“문 밖에 무슨 소리냐?”는 교수법에 입각한 물음이다.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자기를 잃고 대상을 따르는구나.” 그리고 “여래(如來)의 바른 법(法)을 비방하지 마라.”도 역시 교수법에 입각한 꾸짖음이다. 스승은, 남들도 다 듣는 소리가 아니라 네가 들은 소리가 뭐냐고 묻는 것이다. 그 소리를 내 놓아 보라는 뜻이다. 이런 교수법을 선가(禪家)에서는 살(殺)이라 부른다.

말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언론매체의 얼굴을 하고 교묘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말만 쏟아내서는 안 듣는 사람이 있으니, 화면에까지 글자를 동원한다. 언제부턴가 텔레비전 화면 하단에 글자가 등장했다. 뉴스는 물론이고 예능프로그램에도 친절하게 자막을 넣고 있다.

말과 글자는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자기를 잃고 대상을 따르”게끔 한다. 말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법이 있다. 누가 뭐라고 떠들든 곡진하게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저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하면 지지 않는다.

-박재현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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