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바라 : 축복’(부탄, 2013)이라는 영화의 개봉을 많이 기다렸습니다. 키엔체 노르부 감독의 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 감독 영화를 두 편 봤습니다. 어린 승려들의 축구에 대한 욕망을 그렸던 ‘컵’이라는 영화와, 물질에 대한 욕망을 부탄의 풍속과 함께 무겁지 않게 표현했던 ‘나그네와 마술사’라는 영화 두 편이었지만, 울림은 꽤 컸습니다.

완성도를 떠나서 영화의 시선이 따뜻하고, 밝고, 가볍고, 행복한 에너지가 가득했는데, 그게 좋았습니다. 좋은 꿈을 꾸었을 때처럼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영화들이었는데, 이게 키엔체 노르부 감독 영화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탄의 유명한 고승인 키엔체 노르부 감독이 이 번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나름 기대를 하면서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라 : 축복’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꿈에 빠지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리랑카의 풍광은 무척 아름다우면서 열대지방의 생명력이 공감각으로 느껴지고, 초록색의 자연은 인도 여인들이 입는 사리의 화려한 빛깔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또한 여주인공 릴라의 모습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사실 여주인공을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할 정도로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행복한 표정과 생명력은 삶에 대한 찬사 같았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름지기 이렇게 행복해야 하고, 이렇게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는 당위성이 내재된 캐릭터였습니다.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전작에서 키엔체 노르부 감독은 욕망에 빠진 인간의 좀 모자라는 모습을 그렸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내재한 신성을 표현했는데, 그래서 전작보다 더 행복한 영화였습니다.

스토리는 무척 단순합니다. 우리나라 신파조의 삼각관계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구조입니다. 힌두교 신에게 바치는 춤인 ‘바라타나티암’의 계승자인 ‘릴라’라는 처녀가 불가촉천민쯤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현실은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못하고, 처녀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영락없는 신파극입니다.

그런데 해결책이 발칙합니다. 그 동네 최고 부자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안 릴라는 그 남자를 유혹합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처럼 꾸미고 그 부자와 결혼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신파로 시작해서 신데렐라 이야기로 막을 내리는 막장 스토리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사실 이 구조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거짓말에 의한 해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선택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운명을 행복한 방향으로 역전시켰으며, 릴라와의 사랑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샴이라는 청년은 마을에서 조각가로 계속 머물 수 있게 됐고, 또 지주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게 됐으며, 지주의 어머니는 그렇게도 고대하던 손자를 얻은 기쁨에 들뜨게 됐으니 그녀의 거짓말은 결국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은 사회 규범으로 봤을 때 분명 비도덕적입니다. 거짓말을 이용한 해결책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고, 이런 경우 대부분 드라마에서는 더 큰 비극을 예고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짐은 전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그녀의 선택을 지혜로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마불교의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키엔체 노르부는 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거짓말은 분명 5계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지만 감독은 이런 규범 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경허스님이 근대 불교 최고 선승이지만 그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존재에게 계율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과 비슷한 논리에서 릴라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습니다.

릴라는 매우 종교적인 처녀입니다. 크리슈나 신을 위해 춤을 추는 ‘데바다쉬’인 엄마의 뒤를 따라 그녀도 신을 위한 삶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신을 위한 춤인 ‘바라타나티암’을 열심히 배우면서 그녀는 숲 속에 있는 신상에 가서 차를 공양하고, 그 앞에서 춤을 연습하고, 신과 얘기를 나누고,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볼리우드 댄스도 신에게 먼저 보여주고, 또 자신의 고민도 상담합니다. 이렇게 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처녀입니다.

신을 위한 춤을 추고 신과 대화하는 처녀는 어느덧 신의 모습을 닮아갔고, 조각가가 되고 싶은 샴이라는 청년은 신상을 만들 때 릴라에게 모델이 돼 달라고 합니다. 신상 모델이 되면서 샴과 가까워진 릴라는 샴을 자신이 섬기는 크리슈나신으로 혼동하기까지 합니다.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천한 샴에게서 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릴라가 외모 뿐 아니라 마음도 신에게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키엔체 노르부 감독은 <우리 모두는 부처다> 라는 책을 썼었는데, 이 책 제목처럼 릴라는 인간이 가진 불성에 근접한 처녀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이 부처인 걸 모르고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반해 그녀는 신성을 회복했기에 그녀에게서 도덕은 어쩌면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도덕을 택하기 보다는 신성에 바탕 한 지혜를 빌려 다른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독은 계율로 대변되는 형식 보다는 신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성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율과 신성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감독은 릴라로 하여금 신성을 따르게 했던 것입니다.

‘바라 : 축복’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은 신성과 형식이었습니다. 형식은 카스트 제도나 신상에 대한 금기거나 나아가 5계도 포함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형식은 종교의 영속을 위해 꼭 필요한 규칙이긴 하지만 이것이 때로는 불성과 충돌하고, 가끔은 인간 행복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고 감독은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불성이라고 감독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식을 떠받드는 것에 더 치중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때로는 이것이 종교인양 착각하는 양상까지 발생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불성에서 멀어져있기 때문이고 또 그만큼 행복에서도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릴라가 그랬던 것처럼 신앙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릴라는 언제나 신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 보다 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고, 가장 먼저 신을 찾았습니다. 이런 노력에 의해 릴라는 신성을 회복했으며, 그래서 지혜롭고 행복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좀 더 행복해져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릴라의 사는 모습을 보면, 만약 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저런 식으로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감독은 릴라라는 캐릭터를 창조할 때 현실화된 신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릴라 라는 인물을 통해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영화감독이기 전에 승려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설법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방법은 신에 대한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렇게 됐을 때 훨씬 행복하고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릴라 라는 매우 행복한 처녀를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마불교 고승의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바라 : 축복’은 매우 특별하면서도 우수한 불교영화였습니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스토리와 글로벌한 제작팀이 모여 만든 세련된 기교, 그리고 뛰어난 불교의 진리가 어우러진, 무엇보다도 관람하는 시간이 행복했던 영화였습니다. 불자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김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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