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국토(佛國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

만해스님은 1879년 7월20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 19세기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고 사문의 길을 걷기 위하여 설악산 백담사의 연곡(蓮谷)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습니다.

이후 건봉사 만화(萬化)스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龍雲), 아호(雅號)를 만해(卍海)라고 하였습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자 스님께서는 임제종 운동을 전개해 민족불교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중국과 시베리아, 일본 등을 주유(周遊)하며 민족이 나아갈 바를 모색하였습니다.

1913년 귀국 후 스님은 항일운동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불교대전(佛敎大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 저술과 대중강연을 통해 불교개혁과 민족자립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였습니다.
특히 기미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온갖 고문에도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한 유일한 민족대표였습니다.

3·1운동 이후 스님은 선학원에 주석하시면서 ‘신간회’와 ‘만당’ 등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6·10만세운동으로 검거되기도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의 바쁜 와중에도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며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66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선지(禪旨)를 깨달은 선사로서, 방대한 경전을 주제별로 정리한 교학자로서, 죽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로서 누구보다도 청사(靑史)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또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탁월한 시인이자, ≪선원≫과 ≪불교≫지 등 대중교화 서적을 발간하여 민초들의 고통을 달래고 독립과 자유를 각성시킨 진정한 민족의 벗이었습니다.
이러한 만해스님의 다양한 삶의 형태는 깨어있는 구도자로서, 바른 진리를 이 땅의 역사와 삶의 현장에 구현하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돌아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옳은 일이라 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비록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만해 스님.
스님은 중생들에게 진리와 바른 삶을 열어주는 보살로서, 고통 받는 우리민족을 싣고 해방과 독립이라는 정토(淨土)의 언덕을 향해 고해(苦海)를 건너는 나룻배로서 한평생을 살았던,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만해스님! 그러나 당신의 염원과 달리 이 땅은 이제 정토가 아닌 예토(穢土)로 변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의 가치관은 흔들리고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여, 오로지 이기심과 탐심으로 악업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 오늘에 처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해스님 입적 70주기를 맞이하여 간절히 발원합니다. 민족을 위하여 세웠던 그 큰 원력들이 다시 실현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호국영령들과 함께 이 조국을 외호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중생들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슬프게 죽어가는 애혼(哀魂), 원망하며 억울하게 죽어가는 원혼(冤魂), 무관심 속에 외롭게 죽어가는 고혼(孤魂)이 없는 정토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이끌어 주옵소서.

법진스님/본지 발행인 ·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 만해선사의 시 ‘찬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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