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止觀法門>
(B) ○ (沙門曰) 云何為離 謂以無明體是無法 有即非有 以非有故 無可與心相應 故言離也 既無無明染法與之相應 故名性淨 中實本覺 故名為心 故言自性清淨心也

<지관법문>
(B) “그렇다면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무명이란 그 자체가 본디 없는 법이다. 즉 망상이란 없다. 무명번뇌라 여겨지는 것이 비록 있다 여겨지더라도, 사실상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 해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자성청정심’과 더불어 ‘무명염법’이 서로 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성청정심과 무명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무명염법’과 본래의 성질이 서로 합하지 않으므로 자성은 청정하다고 부르고, 아무리 무명 속에 번뇌가 덮여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성 역시 이와 같다. 모든 상대성을 떠난 그 자리는 진실한 자리다. 결코 허망한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 본래의 ‘각(覺)’을 갖추고 있으므로 ‘자성청정심’이라 칭할 수 있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云何為離

무시이래로 비록 무명염법(無明染法)에 덮여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만은 변괴(變壞)하지 않는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손가락으로 눈을 눌렀을 때 눈앞의 허공에는 거짓의 꽃이 일고, 손가락을 떼었을 때는 그 꽃은 소멸한다. 그러나 허공에 헛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떠나, 본디의 허공은 일어났다가 소멸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명염법은 본래 자성청정심으로 더불어서 서로 분리된 것이다. 자성청정심은 영원히 변괴하지 않는다. 자성청정심의 ‘자성(自性)’이라는 두 글자를 체득하고 인식해야 마땅하니, 그 청정한 심성이 자기 본래면목이다. 어둡게 활동하는 오염된 법에 미혹되어 무명망상(無明妄想)을 자체 마음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 謂以無明體是無法有即非有以非有故

본문에서 자체는 변치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이를 비유로 들면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내 눈으로 청황적백(靑黃赤白) 등의 여러 색을 보았을 때, 저 청색 등은 다른 물건이고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자성이다. 눈으로 보는 이 성품은 저 보이는 청색·황색과 더불어 한쪽은 자신이고 한쪽은 타인이어서 본래 서로 분리되어 있다.

때문에 저 청색 등이 나의 보는 눈을 차단하여 장애한다 할지라도, 나의 청정한 보는 성품은 여전히 변괴하는 일이 없다. 만약 우리가 등불을 켤 때 ‘나의 견성이 있다’고 말했다가, 등불을 끈다고 해서 내 견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등불 스스로 자생(自生)·자멸(自滅)하는 문제이지, 등불 끈다고 해서 내 보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보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까만색도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인데, 실상 그렇지 않으니 내 자성에는 변함이 없다.
무명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허공 가운데 피어난 꽃과 같아 본래 그 실체가 없다. 그런데 이 심성은 만법(萬法)을 일으키는 근본이다. 오묘한 자체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는 자체가 있고 하나는 무체(無體)다. 무체와 유체가 서로 합할 수 없고, 한쪽은 청정하고 다른 한쪽은 오염이므로 서로 합할 수 없다.


● 無可與心相應

문장에 언급된 ‘상응(相應)’의 ‘응’은 합한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내 자성청정심과 무명번뇌가 이미 서로 합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무명번뇌는 자체가 없는 법이니 본래 없는 것이 허깨비로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무명번뇌가 허깨비로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지 않다는 뜻이다. 무명은 망상이 진심을 변화시켜 나타는 허깨비 모습이다. 앞에서 눈을 누르면 피어나는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으니, 미친 듯이 일어나는 허공 꽃에 어찌 자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 故言離也既無無明染法與之相應 故名性淨

그러므로 무명이란 실체가 없고, 또한 실체가 없으므로 있다 해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청정한 마음과 서로 합할 수 없고, 서로 합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과 서로 분리된다. 서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번뇌에 쌓여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자성 청정하다고 할 수 있기에 ‘성정(性淨)’이라 한 것이다.


● 中實本覺故名為心

“중(中)이고 실(實)이고 본각(本覺)이므로 이를 마음[心]이라 부른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자성청정한 마음 가운데 실제로 신령하고 밝은 본래의 ‘각[覺)’을 갖추었으므로, 자체도 있고 지혜의 작용도 있다. 그러므로 고요한 자리에서 바로 사물의 이치를 관조하는 지혜의 작용이 있으므로 이를 마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자성이 ‘있다’·‘없다’는 것을 양변(兩邊)이라 하는데, 보통 ‘중(中)’이라 논의할 때 상대적인 중간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형질과 물질처럼 실재가 있는 것이라 오인해서는 안 된다.


● 故言自性清淨心也

위에서 전개한 의미를 총체적으로 묶어 ‘자성청정심’이라고 명칭을 수립한 까닭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배우는 이들은 이 ‘자성청정심’이라는 명칭을 듣고 빨리 그 명칭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 자기 심성상에서 알아차려야만 한다.

심성이라는 것에 자체가 있지만 무명이라는 것에는 자체가 없다. 심성과 무명이 서로 합할 수는 없다. 본래적으로 서로 분리되었는데, 여기에서 이 소식을 꿰뚫을 수 있다면 종지의 귀결점을 알고 본체에 통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바로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큰 길이니, 우리들은 ‘자성청정심’이라는 말을 착안하고 착안하여 잘 생각해야한다.

<止觀法門>
○ 問曰 云何名為真如
○ 答曰 一切諸法依此心有以心為體 望於諸法法悉虛妄有即非有 對此虛偽法 故目之為真 又復諸法雖實非有 但以虛妄因緣而有生滅之相 然彼虛法生時此心不生 諸法滅時此心不滅 不生故不增不滅故不減 以不生不滅不增不減 故名之為真 三世諸佛及以眾生 同以此一淨心為體 凡聖諸法自有差別異相 而此真心無異無相 故名之為如 又真如者 以一切法真實如是唯是一心 故名此一心以為真如 若心外有法者 即非真實亦不如是 即為偽異相也 是故起信論言 一切諸法從本已來離言說相 離名字相離心緣相 畢竟平等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故名真如 以此義故自性清淨心復名真如也

<지관법문>
◎ 지면 관계상 본문의 해석은 <강해>에서 진행하기로 한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問曰 云何名為真如

질문자는 대사에게 여쭈었다.
: 마음은 무엇 때문에 진여라 이름붙입니까?

● 答曰 一切諸法依此心有以心為體
대사께서 답하셨다.
: 일체 제법의 모든 법이 이 마음을 의지해서 있다. 일체제법이 내 마음으로써 근본 자체로 삼는다.

● 望於諸法法悉虛妄有即非有 對此虛偽法 故目之為真 又復諸法雖實非有

모든 제법에 대입하였을 때, 제법은 전부 허법이다. 내 망상분별의 모습이다. 제법은 ‘있다’ 해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허망하고 거짓된 제법과 반대개념으로 대비를 하여 정리해보면, ‘진여(眞如)’라는 말의 ‘진(眞)’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허망의 반대개념이다.


● 但以虛妄因緣而有生滅之相 然彼虛法生時此心不生

또한 모든 제법이 비록 실제로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중생들의 허망한 인연이 망상인연이 화합하여 그 제법은 끝없이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저 허망한 제법이 일어날 때 마음은 그 허망한 법을 따라 일어나지 않고, 허망한 제법이 소멸할 때 이 마음은 제법의 소멸을 따라 소멸하지 않는다.


● 諸法滅時此心不滅 不生故不增不滅故不減

만약 내 마음이 망상을 따라 일어나서 망상의 소멸을 따라 사라지면 한 찰나에 ‘생(生)’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자체는 여여부동(如如不動)하므로, 아무리 망상이 생멸한다 할지라도 내 진실한 근본마음자체는 생멸하는 망상을 따라 생하고 멸하는 일이 없다.

● 以不生不滅不增不減 故名之為真

그러므로 내 마음이 제법을 따라 일어나지 않으므로 내 마음은 증가하는 법도 없다. 제법을 따라 소멸하지도 않으므로 제법의 소멸을 따라 감소하지도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리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므로 ‘진’이라 이름 붙이는 것이다.

● 三世諸佛及以眾生 同以此一淨心為體 凡聖諸法自有差別異相

3세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중생은 한결같고 청정한 마음으로써 청정한 본체로 삼는다. 6도범부나 출세간 4성 모두 현실적으로는 차별이 있고 차이나는 모습이 있으나 이 진실한 마음은 성인이나 범부의 차이가 없고 별개의 모습도 없다.

● 而此真心無異無相 故名之為如

일체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이고 하나의 이치다. 그 때문에 이 우주만유가 현상적으로 차별나지만 실제로 하나의 생명체다. 불(佛)과 중생(衆生)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는 말에서 ‘여(如)’라 한 것이다.

● 又真如者 以一切法真實如是唯是一心 故名此一心以為真如

이 ‘진여’라는 것은 ‘진실’에서 ‘진(真)’, ‘여시’에서 ‘여(如)’다. 일체 모든 만법이 오직 진여일심(眞如一心)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심의 명칭을 ‘진여’라 하는 것이다.

● 若心外有法者 即非真實亦不如是 即為偽異相也

만약 내 일심 밖에 따로 개체로서 실재하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또한 ‘여시’도 아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은 거짓이고, 제법과 내 마음이 다른 모습이 된다.

● 是故起信論言 一切諸法從本已來離言說相 離名字相離心緣相 畢竟平等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故名真如

이러한 이유로 기신론에서 말하였다.
‘일체제법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언어적인 설명의 모습을 떠났고, 명자(名字)의 모습을 떠났고, 마음으로 부여잡고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모습[心緣相]을 떠났다. 필경에 우주 만유가 일체중생과 삼세제불이 하나의 이치로 평등하여, 거기에는 모든 상대성이 끊어져서 변이(變異)함도 없고, 거기에는 모든 생멸이 단절하였으므로 파괴(破壞)가 불가능한 오직 진여일심일 뿐이다. 그러한 상태를 굳이 명칭으로 불렀을 때 진여라 하는 것이다.’

● 以此義故自性清淨心 復名真如也

이 의미 때문에 자성청정심을 다시 ‘진여’라고 명칭하게 된다. 진여를 종합적으로 해석한 후 그 증명을 <기신론>을 통해 증명하고 결론을 맺었다. ‘진’이라는 것은 허망하지 않다는 뜻이다. ‘여’는 차이가 나지 않고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계속)

* 지난 7호의 내용 중 다음을 정정합니다.
“우리는 ‘염법인연(染法因緣)’을 따르고 있으니 무념불각(無念不覺)의 망념이 일어난다. 이를 ‘불각염기(不覺念起)’라 한다.”를 “자체는 비록 변하지 않지만 염법인연을 따르고 있다. 이른바 무명불각의 망념이 일어난다.”로 정정합니다. - 정리자

講 : 송찬우(중앙승가대학교 교수)
集 : 정성우(한국불교선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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