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은 대체로 그 사회의 문화수준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다. 세계사 곳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평가받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나 조선 중기 유교공동체의 경우는 각각 그리스도교와 성리학이라는 강력한 도덕이자 이념의 장악과 지배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수준은 교회가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고 성리학자 집단들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무너지자 급속도로 붕괴되면서 배척과 극복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비극의 역사로 이어졌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이념이었던 불교는 정치권력과의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눌스님으로 상징되는 개혁파의 혁파와 재편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의 시대를 말법시대(末法時代)로 규정지었던 지눌은 승려로서의 보장된 출세길을 과감히 버리고 당시에는 오지 중에도 오지였던 지리산으로 내려와 붓다의 정신을 되살리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한국불교의 건강한 전통이 오늘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요즈음 총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윤리 수준이 논의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우리 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맡고 있거나 맡게 될 사람들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도덕 또는 윤리 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윤리적 수준에 관한 성찰의 물음이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과 복합성은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강화된 전통에 대한 부정이 새마을 운동으로 상징되는 급속한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절정에 다다른 근현대사의 굴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를 정착시킴과 동시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세계 1위의 자살율이라는 이중적인 지표를 지닌 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러한 지표들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윤리적 물음을 절박하게 떠올리게 하는 배경 요인이 되고 있고, 그렇게 한동안 경원시되었던 전통과 윤리가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나 경제는 본래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나누는 분배의 기준과 관련된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른바 호모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나 호모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는 호모에티쿠스(윤리적 인간)와 차원이 다른 인간형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생멸(生滅)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인간형이고, 후자는 진여(眞如)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멸과 진여 사이에 불이적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고유성이고, 바로 그 이유와 근거를 바탕으로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윤리를 요구할 수 있다.

총리나 장관 같은 고위공직은 그 영향력이 막대할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우리 시대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시민의 도덕성에 더해서 그 역할에 걸맞는 역할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청문회나 언론을 통한 치밀한 검증과정은 필수적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해야 하는 도덕성은 고려의 스님이나 조선의 선비와 같은 수준의 도덕성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들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민이고, 다만 일정한 시기동안 그 역할을 맡을 사람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윤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관심이 나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는 일관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윤리의식일 뿐이다. 윤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지만, 그 관계 또는 인연을 매개로 삼아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과 실존적 요청으로 남게 된다는 불교윤리의 기본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시절이 깊어가고 있다.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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