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은 인재를 천거함에 안으로는 친척을 피하지 않았고, 밖으로는 원수를 피하지 않았다. 이는 오직 진실되고 현명한 자를 천거하기 위함이었다.”

정관(貞觀)의 치세를 이끈 당태종(唐太宗)이 신하들에게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며 한 말이다.


사람의 능력과 인품만을 보라

친척이라고 해서 꺼리지도 말고, 원수라고 해서 피하지도 말고, 오직 그 사람의 능력과 인품만을 보라는 얘기이다. 당태종 자신도 위징(魏徵)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위징이 누구인가? 태종이 아직 왕자 이세민이던 시절, 태자이며 큰형인 이건성의 측근으로 끊임없이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한 사람 아니던가? 그런 위징을 태종은 간의대부에 앉히며 직언을 서슴지 말라고 당부한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은 화살에 허리띠가 맞는 아찔한 순간을 겪었다. 공자시절 공자 규(糾)와의 싸움에서 규를 섬기던 관중(管仲)이 쏜 화살이었다. 이런 관중을 환공은 포숙아(鮑叔牙)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상에 앉힌다. 관중은 과연 경세가로써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며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첫손가락에 꼽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땅까지 좁아 인재가 드물게 나옴은 옛부터 걱정하던 일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하는 길이 더욱 좁아져 대대로 벼슬하던 명망 높은 집안이 아니거나 과거 출신(科擧出身)이 아니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으니, 동굴이나 초가집에 사는 가난한 선비는 비록 도덕성과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쓰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라고 하고 있다.”

400여년전 허균(許筠)이 〈유재론(遺才論)〉에서 한 말이다. 그들끼리 돌아가며 계속 해먹으면서 인재가 없다는 타령만 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소수의 특권층에서 나오는 횡포

조선은 서얼(庶孼)이니 재가(再嫁)니 하는 명칭을 붙여가며 신분적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어디에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이런 차별은 소수의 특권층이 행한 횡포에 다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저들에게는 딱 지들끼리 해먹기 좋은 정도만큼만 나라가 유지되면 좋은 거였다. 나라의 규모를 키우려면 그만큼 널리 인재를 발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들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이 일찍이 대운하를 뚫을 때 조선은 조그만 경인운하 하나 개통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얼마나 무능했으면 몇 삽 뜨다 마는 일이 되풀이 되었을까? 조선의 양반관료들은 길을 넓힐 줄도 모르고 넓힐 의지도 없었다.
중기 이후에는 붕당(朋黨)정치가 진행되며 그 좁은 인재풀에서 다시 네 편 내 편으로 나누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요직을 독점하는 걸로 능사를 삼으니

“말세에 인재는 점점 옛날과 같지 않은데, 당론에 막혀서 등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어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옥오재집》

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는 당파에 더하여 지연에 학연에 이리 막고 저리 좁혀 놓고서는 인재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유사한 재앙과 무능이 되풀이되는 것 아닌가.
인재 없음도, 인재를 발탁하는 시스템도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문제는 인재를 구하는 자의 도량이다.

박근혜 정부와 조계종의 인사 공통점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국무총리 등 인사실패의 이유를 국회제도와 언론의 검증 탓으로 돌리며 인재가 없다고 해 하는 말이다. 사정은 조계종 총무원도 마찬가지다. 제34대 집행부 2기 인선에서 드러난 인사는 ‘회전문’, ‘측근고용’, ‘선거보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재를 못찾는 인사는 늘 불안하고 이런저런 분란과 갈등만 야기할 뿐이다.

-철학박사·충남대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