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圓宗)은 1910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단이다. 원종은 친일 성향이 강했던 불교연구회를 대체해 설립됐지만 대중의 기대와 달리 창립 초기부터 친일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해 10월 종정 이회광이 일본에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 7개조’를 체결하고,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 책동했다. 이에 대항해 조선불
전국 72개 사찰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이회광은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6일 조동종과‘연합맹약 7개조’를 체결했다. 맹약은 겉으로는 연합을 표방했지만 실제 내용은 예속이었다.이회광은 귀국 후 전국 주요 사찰을 방문해 대등한 관계에서 맹약을 체결했다며 동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원종 종무원 서기가 조약 전문을 통도사에 전하면서 대중의 분노를 샀다. 맹약의 실체를 확인한 승려들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으로 개종시키려는 음모이며, 우리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소행”이라고 분개하고, 일본불교에 복속시키려는 조동종과 이회광의 마수로부터 조선불교를 지키려는 보종(保宗)운동을 전개한다. 그 결실이 조선불교임제종 운동이다.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로 1985년 승려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다. 서양종교의 유입과 일본불교의 진출이 이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불교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킨다.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우고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두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토록 한 것이다.원흥사(元興寺)는 당초 대한제국 황실과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
재단법인 선학원의 역사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사판계 중심의 친일불교계에 맞서 이판계의 수도도량으로 창건된 곳이 선학원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는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핍박과 침탈의 역사였다. 개국 이후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이 이어지면서 승려는 온갖 잡역에 시달려야 했고, 양반과 관아의 벼슬아치로부터 갖은 멸시와 수탈을 당했다. 일본불교는 고종 13년(1876) 강화도 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체결 이듬해 9월 28일 정토진종 대곡파 동본원사가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을 조선에 파견한 것이 시초다.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은 일제의 대외 침략정책의 일환이었다. 메이지유신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에도 신페이(江藤新平)는 불교를 대외 침략 정책에 활용하자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일본불교가 정부의 대외 침략정책에 적극 호응했던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는 신도(神道)가 중시되면서 ‘폐불훼석(廢佛毁釋)’의 법난을 당한 탓이다. 일본불교계는 정권과 타협해 국수주의적 색채를 강화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대외 침략의 선봉에 선 종교는 침략국에 대한 피해국 국민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