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8개월에 걸쳐, 총 열여덟 분의 선학원 설립조사 및 이사장 스님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열전을 게재하였다. 현존해 계신 14대 이사장 법원 진제(法源 眞際, 1930~ )은 제외하였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1979-1944)스님을 필두로 남전 한규(1868-1936), 도봉 본연(1873-1949), 석두 보택(18
남산 정일 (南山正日, 1932~2004) 선사께서는 선학원 제15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 당호는 남산(南山)이고, 출가 전의 속명은 ‘이득(二得)’을 쓰셨다. 서울 은평구에서 1932년 음력 2월에 출생, 1956년에 조계사에서 득도 이후, 1963년에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 후 10여 년간 전강(田岡)
효일 범행(曉日 梵行, 1921~2012) 스님은 선학원 설립 이래 17년에 이르는 최장기간 법인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선불교의 맥을 면면히 계승한 우리 시대의 장로(長老)였다.범행 스님은 1921년 음력 2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부친 전주 이(李)씨 경순(景順)과 모친 밀양 박(朴)씨 흥옥(興玉)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가 전 이름은 임배(林培)였다.동갑내기였던 부모는 나이 마흔두 살에 막내아들을 얻었고, 스님은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군인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군복을 벗고, 포목점과 방앗간 등을 운영했다.
향곡 혜림(香谷 蕙林) 스님은 불교정화의 시기에 우리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어른 중의 한분이다. 재단법인 선학원 제11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스님의 법호는 향곡(香谷)이고 휘는 혜림(蕙林)으로, 운봉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스님의 문하이다. 스님은 서기 1912년 정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서 출생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속명
노노당 이대휘 스님은 청담 스님, 영암 스님, 성철 스님 등 근대 고승들의 도반으로 경학에 밝으시고, 계율에 엄하시며, 선화에도 능하신 스님이셨다. 조선 조계종맥의 태고 보우에서 7대 부휴의 정통 맥을 이은 16대 월헌(月軒) 정광(淨光) 선사로부터 법통을 이어 받으셨다. 은사 하정광 스님으로부터 대휘 스님이 받은 전법게(傳法偈)는 다음과 같다. 松鶴千秋月
“한 생각 밝으면 극락이요, 한 생각 어둔 것이 곧 지옥이다.” 근·현대 한국불교에 있어서 한국불교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대의 동원스님은 선학원 제 8대와 10대 이사장을 2번 역임했다. 스님은 1901년 예천군 풍양면 신기리에서 부친 이병규(李柄奎) 공과 모친 이억순(李億順) 여사의 둘째로 태어났다
청담 순호(靑潭 淳浩, 1902~1971) 스님은 재단법인 선학원 제 7대 이사장과 조계종 통합 종단 제 2대 종정을 역임하셨다. 아명은 찬호(讚浩), 도호(道號)는 올연(兀然), 법호는 순호(淳浩)이고 불교정화운동 시기에는 법호를 청담(靑潭)으로 쓰셨다. 스님께서는 1902년 11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열일 곱 나이에 서당
석주 정일 (昔珠 正一, 1909~2004) 스님은 190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다. 15세 되던 1923년 서울 선학원에서 남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6년 간 선학원에서 행자 생활을 하셨고, 1933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 참선 정진을
경봉 스님은 참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되 경전공부와 염불도 겸했다. 흔히 선승들이 기피하는 주지직과 포교사 역할까지 기꺼이 맡았던 대승보살(大乘菩薩)이었다. 그리고 왜색불교에 대항하여 불교개혁운동가로서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초부 적음((草夫 寂音, 1900~1961) 스님은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 및 제3대・제5대 이사장, 호국역경원 초대 원장, 마곡사 주지 소임을 역임하셨다. ‘초부(草夫)’는 ‘풀로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이’라는 뜻이고 ‘적음(寂音)&rsq
조사열전-5 용성 진종(龍城震鐘, 1864∼1940) 선사는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鐘),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잡은 물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모두 살려주는가 하면, 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고사리가 아프니 그만하자고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서 1871년(高宗 8년)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탄생하셨다. 속성은 송씨로 휘(諱)는 도암(道岩),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스님은 덕숭산과 선학원에 머무시며,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스님은 만해 스님과 독립에 대한 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불교개혁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성월 일전(惺月 一全, 1866~1943) 스님은 주로 부산 범어사에서 활동하였지만, 1920년대 이후에는 선학원 건립과 발전에 공헌한 고승이기도 했다. 성월 스님은 1866년 7월 15일 경상남도 울산군 온산면 강양리에서 출생하였고 속명은 철근(哲根)이었다. 스님의 부친은 오사홍(吳士洪) 선생이고 모
남전(南泉 翰圭)·도봉(道峯 本然)·석두(石頭 寶澤) 세 분의 선지식은 1921년 당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이판계의 수장인 만해 용운스님을 중심으로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을 준비, 민족불교의 수호를 위한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朝鮮佛敎 禪學院 本部)’를 설립하였다. 1910년 경술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 멸절에 맞섰던 불교계 개혁파 선사들은 선학원으로 독립과 개혁의 서막을 열었다.선학원 조사스님들은 임제종 운동의 선풍을 이으며 3·1독립운동을 승계하고 독립선언에 앞서 투옥된 만해 용운스님의 출옥에 대비 1921년 10월 4일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를 서울 안국동에 상량하고 선학원 건립을 시작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