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문학과 불교문화 두 가지 전공을 했다. 불교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홍윤식 교수님이었다. 그분 덕에 불교문화재를 공부했고, 문학과 불교와의 접목도 가능했다. 동국대학교 전산원에서 교수로 근무할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선생님이 원광대학에 재직하시다가 동국대학교로 부임해온 무렵이다. 동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신 허천택 선생님에게 선생님에 대한
나는 조부모와 고모, 아버지까지 열댓 명의 대식구가 모여 살던 시골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특별한 종교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려서는 불교와는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다만 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홍성의 절에 가끔 갔던 기억은 난다. 수학여행으로 자주 수덕사를 찾아가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일엽스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땐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
나의 스승인 이기영 교수는 1922년생이다. 살아계셨다면 올해 아흔 셋이 되신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인 선생님은 대동아전쟁 때 미군 포로가 됐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셨다. 선생님은 대지주의 아들이라 공산당의 핍박을 많이 받았다. 남한에 연고지가 없으셨던 선생님은 1954년 즈음 대구에서 머무셨다. 먹고살 길이 막연하셨을 때다. 가톨릭수도원서 허드렛일을 하시
은사이신 범행스님은 정화 초기, 아니 정화 전부터 팔달암에 주석하셨다. 당시 비구승으로 절을 가지고 주지하시는 분은 적었다. 큰 절은 모두 대처승들이 운영하고 있던 시기였다. 우리 스님의 은사이신 금오큰스님께서 정화의 주체세력이셨는데 큰절을 가진 대처승들에게 비구들 수행처라도 정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전혀 배려가 없었다. 비구승들이 수행할 수 있는
나의 학창시절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다. 부산에서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에 입학했다. 전쟁 중이라 서울대학교 역시 부산으로 피난 온 것이다. 1953년에 2학년이 되고 그해 여름방학 때 서울이 수복되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2학년 때 지도교수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손보기 교수님이다. 서울대 대학원을 갓 나와서 정열적으로 ‘국사학개
한국의 유마거사라 불리는 백봉 선생님을 만난건 대학교 3학년 가을의 일이다. ‘라 메르(La Mer)’라는 경남여고·경남고 출신들의 교양단체 활동을 하던 나는 선배의 소개로 보림선원을 가게 됐고, 거기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바다라는 뜻을 지닌 ‘라 메르’는 였다. 사실 나는 그때 불교의 &lsquo
“내 연구실에 있을만한 학생이 있을까?” 당시 불교학과 1학년 과대표를 맡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물으셨고, 한 친구를 떠올린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예,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연구실에서 나간 나는 곧장 그 친구를 찾았고, 선생님 앞에 세웠다. 이후 그 친구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나의은사이신 노노 대휘스님은 일반대중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하지만 청담(靑潭), 영암(暎巖), 성철(性澈)스님 등 근대 고승들과 도반이셨던 분이다. 경학에 밝고 계율에 엄했으며, 선서화에도 능하셨다. 대휘스님은 조선 조계종맥의 태고보우에서 7대 부휴스님의 정통맥을 이은 16대 월헌 정광선사로부터 법통을 이으셨다. 법통을 소중히 여기며 수행자
내가 동국대에 입학해서 2학년이 됐을 때다. 김동화 선생님이 동국대에서 하는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1962년,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강의는 1963년 유식학 강의였다. 동국대에 입학하기 전부터 유식학이 뭔지 참 궁금했다. 한 때 출가생활을 조금 한 덕이다. 경전을 보면서 유식학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되고, 모든 난해한 용어나 풀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다. 항상 성격이 내성적이던 나는 불심이니 부처님이니 하는 걸 더 몰랐다. 다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가 막연하게 생각을 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마음고생도 했다. 그 와중에도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행복하게 잘 사는 법에 대한 고민은 어려서부터 쭉 이어온 것 같다. 어느 날 무작정 동래 범어사를 찾
지난해 11월 27일, 동국대학교 부속 중학교 큰법당에서 특별한 교직원 법회가 열렸다.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를 법사로 모신 법회였다. 선생님의 마지막 대중법문은 마지막인지도 모르게 시작됐다. 법회가 열리기 전 연락을 드리니 투병생활 속에서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유난히 생생했다. 오대산 상원사로 기도도 다녀왔다고 하셨다. 얼른 법문을 부탁드렸다. 몇 안 되는
나의 은사 석주 큰스님은 일제강점기인 1909년 경북 안동군 북후면에서 태어나셨다. 1923년 남전스님을 은사로 선학원에서 출가하셨고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을 졸업하셨다.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사,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셨다. 스님께서는 환갑이 지나서도 관응스님과 같이 법전 전 종정스님께서 주석하시던 가야산 수도암에서 정
내가 출가를 해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조계종을 대표하는 율사 해인사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건 1979년이다.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대영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이 말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내가 대영스님은 모신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 후 1년여를 모셨을 뿐, 연세가 많으셨던 은사스님은 사바세계에 오래 머
‘삶이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중학생이던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다. 당시 어머니는 상도동 백운암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권유로 백운암을 찾았고 거기서 성수스님을 처음 뵈었다. 그렇게 참선을 하며 스님의 가르침을 접했고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1953년 음력 2월 8일 출가재일. 부산 선암사에서 난 은사도 정하지 못한 채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다. 이날 함께 계를 받은 도반은 나를 포함해 5명. 다른 4명은 흔쾌한 수락 하에 저마다 은사를 결정했다. 도반들은 한결같이 인물과 풍채가 좋았다. 스승이 먼저 제자를 지목할 정도였다. 거기엔 지금 고인이 되고 없지만 훗날 유명한 불교학자가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