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 혼란과 무질서로 엉망진창인 사회상을 보면 옳은 지적 같다. 사람값을 물질의 양으로 달고 생애목표를 행복과 안락으로 삼는 여기는 지금, 서로를 의심하다가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가망 없는 땅덩어리다. 휴대용 권력인 돈에 취해 인간이란 사실을 새까맣게 망각해서 온전한 영혼 지켜내기라는
이슬비 몇 방울과 함박눈 큰 술 두 스푼을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버무리면 마음이 환해지던 때가 있었다. 새들의 노랫소리 맑은 숲처럼 그렇게 화사한 시절이다. 삶은 인간에만 가혹할까? 햇살 아래 모든 게 익어갈 때 사람 어깨에도 싸라기가 하얗게 쌓이는데, 유독 인간만은 살수록 거무튀튀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 늙다는 낡다와 같은 말이던가. 지난 여름도 혹독했다.
‘지속가능경영’은 인간이라면 꼭 이뤄내야 할 과제다. 허나 젊어서의 부귀가 늙어서도,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꿈이어도 가당할지는 의문이다. 똑같은 욕망을 가졌던 그 어떤 문명도 대제국도 유물로만 존재할 뿐 모두 스러졌으니, 허락되지 않는 탐욕에 홀려서 또 다시 집착하는 무지의 역사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대체 누가 ‘인간의 설정
우리는 입버릇처럼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생사유전生死流轉의 미계迷界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진해서 카오스를 불러들이는지도 모른다. 목구멍이 가늘어서 배고픈 아귀 같이 돈 쫓아 쏘다니는 업보로 바늘구멍 앞에서 좌절하는 낙타가 수두룩하니, 아무래도 빈곤한 세상은 없어질 것 같지 않다. 팔다리를 잃고도 헛팔다리가 아픈 ‘환상사지 신드롬
하늘의 별을 따러 오늘도 비행을 꿈꾸는 사람아. 도대체 별이 뭐기에 하늘에 오르려는가. 진정 세상을 밝히는 별 떨기를 소망하는가. 아니면 위에서 군림하는 별이길 바라는가. 하늘에 닿기 전 빛을 잃고 지옥으로 추락하는 별일지라도 그래도 욕망하는가. 그래서 악착같이 튼튼한 줄에 줄을 대려고 긴장하는가. 나폴레옹, 칭기즈칸은 인욕의 세월을 감내하며 대륙을 삼켜
인간은 동물과 실현축에서 갈라섰으니 몸바탕, 태토胎土 때문이다. 욕망실현에 시련은 필연인데 고온·고압을 견디는 흙이 따로 있고, 토기, 도기, 자기가 그러하듯 방수성과 단단함이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그릇이 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 삶이 언제 편안한 적이 있던가. 역사가 언제 인간 사정을 봐주던가. 그러니 공부하라. 하지만 지식
온 곳이야 제각각 다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천상계로 왕생할 성인聖人의 꼴로 태어났다. 그런데도 사람의 값어치는 하늘과 땅, 십인십색이다. 죽음을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하면 가쁜 숨, 붉은 핏대, 세력다툼, 아수라장, 지옥이 따로 없다. 땅에다 뿌리박고 땅따먹기 권력쟁투 그러고도 나무행세, 숲 시늉이다. 공기는 탁하고 성은 무너지는데 모세혈관이 사라져 영적상상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고치를 향하고, 바다로 내려가 평생을 살던 연어는 물살을 거스르며 강으로 돌아가는데, 인간의 수레바퀴는 달리고 달려 어디에 닿으려나. 때가 되면 날개를 지으려 고독의 방으로 올라가는 나비처럼, 상류를 향하는 연어도 껍질과 살이 부셔져 형체가 사라져도 주저함 없이 강에다 목숨을 건다. 대대로 탄생한, 그 색깔, 그 냄새, 그 맛의 할머
모양을 지탱해주는 살은 뼈대이다. 우산살이 부러지면 소낙비를 피할 수 없고, 부챗살이 동강나면 바람을 부르지 못하듯이 바퀴살이 절단 나면 달리던 수레도 멈추고 만다. 윤회의 수레바퀴에도 차륜車輪과 연륜年輪이 있으니, 살로써 마음을 잃을까 두렵다. 만약 물질을 삶의 뼈대로 삼고 산다면 닳으면 버려지는 차바퀴가 될 터이니 고행만 하다 말 것이고, 나잇값을 제대
단단한 골반 나비, 전신을 흐르는 갑상선 나비, 얼굴 틀을 잡고 있는 말랑말랑 접형골蝶形骨 나비, 나비는 삶의 조화와 균형을 관찰하고 느낌으로만 말 거는 영혼은 심리를 파고드는데, 망망대해로 잊히는 불안에 둑이 와락 무너진다고 저급한 질투로 칭칭 나비를 동여매면서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마음 날을 벼리시는가. 고즈넉한 달 물결이 가슴 언저리 과녁을 맞히면 뿌
세상은 학교, 손만 뻗으면 무어든 배울 거리 삶은 학습과정, 공들여 공부해야 무지sin를 떨치고 인간은 학과목, 적성에 따라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나 피할 수 없어 사건 사고는 진급시험, 기꺼이 맞이하고 곱게 배웅하리. 오늘도 행복의 해解를 찾는 사람아. 나비 알이 애벌레로 거듭날 때, 물질적 성공을 평생 기도하면서 삶을 고해라 하시었나. 애벌레가 세상에서
그러나 삶은 매일 앞으로 가고, 위로 오르는 ‘동시성’의 모순을 사는 일이다. 육체를 먹이려고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지만, 정신을 살리려면 속도를 줄이고 육체의 옷을 벗고 내면을 살펴야 한다. 지식을 배우려면 네모적이어야 하나, 지혜는 동그라미에만 쌓인다. 깜깜한 밤중의 노랑 점멸등처럼 갈등 중인 삶, 세모▼,△의 갈림길에서 속도를 줄
잠자리 유충이 올챙이를 먹고 몸을 키울 때 성충은 벌레를 먹으며 전쟁을 피한다, 나비도 변태를 거듭하며 고치 속에서 날개를 얻고 애벌레의 먹이와 영영 이별한다. 먹거리가 같은 인간은 숙명적으로 세대 간의 전쟁, 자기 안의 투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탁 속에 청이, 어둠 속에 밝음이, 탐욕 속에 각성이 있는 것처럼, 모든 ‘속’에는
네모 위에 얹어진 동그라미, 사람이다. 한 꼬마가 물었다. “세모는 없어요?” 엄마가 아플 때나 장난감 때문에 동무와 싸울 때, 어디가 아팠냐고 되물었다.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거기가 세모란다.” 상반신은 세모다. 삶은 셈 놀이다. 생존과 생활을 위해 평생 덧셈과 곱셈에서 헤어날 수 없다. 자신이 그렇
몸을 받고 마음을 얻었으니, 바탕軸 별로 떠오르고 성인을 추구하니, 욕망축 살피고 정성을 다해, 실현축 □와 △의 바탕축이 +과 –으로 균형을 잡아 지옥계를 면하고 아수라계를 떨치듯이 □와 ○의 욕망축은 곱해서 크게 나누려함이니 □와 △의 실현축은 허물을 반성하고 거짓 없이 진실해야 이루리라. 삶에 오그라들어縮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으려면 흙처럼
삶□에서 ○로 오르는 차원여행인성을 닦아 화안和顔에 이르는 도정搗精, 도정道程세모진 건널목을 건너지 않고서 가 닿을 수 없는 동그라미눈물로 가슴△을 적시지 않고 다다를 수 없는 하늘마지막 해탈의 기회 죽음으로걸을 뿐엄도경 | 수필가엄도경 | 수필가
직업이 개인과 일가족의 생계와 생활을 돕는 거라면 직무는 운명의 지렛대가 되고 날개를 만드는 일이지. 직업을 커리어career라 부르는 이유가 경유했던 직무경력을 고스란히 담아 서듯이, 직업의 또 다른 표현인 calling소명에는, 사회공동체의 공진화를 함께 이뤄야한다는 책임이 새겨져 있어. 행운의 지렛대가 빼곡히 기록된 이력서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회지도
인간 형상이 □와 △, ○인 까닭은 삶의 터전인 땅과 어느 날 되돌아가야 할 하늘 사이에서, 아홉 개의 구멍 때문에 벌어지는 생존과 존재의 외줄타기에서 △▼의 흔들림을 뒤로 하고, 결연코 동그라미를 향해 △꼴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메타포이지. ‘텅 빈 육체’의 결핍된 욕구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점점 사회갈등이 깊어만 가는 것은, &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환법칙이 지구공동체를 유지하듯이, 인간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에는 ‘위상이동’이 있어. 이건 자연이 제시하는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세대 간에 벌어질 먹이전쟁 같은 충돌을 근본적으로 피하려는 방편인 거야. 올챙이가 물속에서 살 때 개구리는 물살을 가르고 뭍을 오가는 것처럼, 잠자리의 유충이 물에서 살 때,
20세기까지의 인재는 스펙에다 전문성을 갖추면 충분했었지. 대학교 졸업장 하나로도 남이 부러워할 직업을 얻을 수 있었거든. 개인의 이기심이 국력이 되었던 시대였으니까. 경쟁에서 이기면 ‘존재 증명’이고 그 자체가 ‘애국’이였지. 21세기 지식정보시대는 공동체를 무시하는 근시안적 인재人材는 걸림돌이 되었어. 권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