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종의 설립과 조동종 맹약1) 원종의 설립과 활동도성 출입 금지 해제 이후 일본 불교의 진출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들의 움직임에 놀란 조선 왕조는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대법산으로 삼고 지방의 주요 사찰 16곳을 지정하여 중법산으로 삼았다. 일본 불교의 조직적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는 조선 불교를 통합․ 정리해서 보호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원흥사는 창건되면서부터 총종무소(總宗務所)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치된 승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도섭리(都攝理)와 내산섭리(內山攝理)였다. 도섭리는 종무
2) 일제의 조선 불교 통제 정책이와 같은 저의를 지닌 일본 불교는 실제로 조선인의 포교와 조선 불교 인사들의 유인과 포섭 그리고 개종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던 방법은 좌담회나 물질적 공여 그리고 교유와 친밀한 관계의 유지였다. 이런 방법 이외에 좀 더 특수한 방법으로는, 오꾸무라엔신이 1898년 광주 개교가 결정되면서 포교 목적 및 방법에 관해 본산에 제출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었다.첫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장려하여 가능한 물질적 개발에 힘쓰는 방법을
2000년 ‘역사적 사변’ 일어나다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그제 날(2일 전),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 정상의 만남은 “평양이 열렸다. 뜨겁게 손잡았다. 역사를 새로 쓴다.”라는 문구가 남녘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로 장식됐다.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문을 연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만찬 모두발언에서 “이제 공동성명에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라고 두 정상이 합의한 공동선언에 관해 이야기했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 5개 항을 담은 정상회담 공
“조불련, 다시 변모하다”북측의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1994년 6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선언으로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이 그해 6월 15일 평양을 방문하는 등 긴박하게 돌아가던 한반도 정세에 전환점으로, 남북정상회담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점에 ‘김일성 주석 서거’라는 중대 변수가 발생했다. 이어 남측의 조문 파동으로부터 남북관계는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그 시기 북측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가 생겨났다. 이른바 삼년상 패러다임이다. 중국 공자의 《논어》 에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나야 부모 품
2. 일본 불교의 확산과 일제의 통제1) 일본 불교의 인식과 확산조선조 수백 년간 행해진 도성 출입 금지는 불교계에 대한 사회적, 인격적인 하락을 가져온 배불정책이었다. 이같이 조선 불교와 승려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일본 승려에 의해 일시에 철회되면서 일본 불교에 대한 경외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895년 4월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자 사노젠라이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고 있는 용주사 승려 상순(尙順)의 표현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대조선국 수원 화산 용주사 승려 상순은 삼가 대일본대존사 각하에게 축하의 절
“비할 데 없이 오묘한 보물인 보살은 모든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샤카족 마을에, 룸비니 동산에.” - 《숫타니파타》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날입니다.부처님께서는 2600여 년 전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29세에 출가하시고, 6년의 고행 끝에 35세에 깨달음을 얻으시어 45년간 법을 설하시다가 80세를 일기로 입멸하셨습니다.그러나 부처님은 단지 80년 동안만 이 세상에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억겁의 세월동안 온갖 중생의 모습으로 세간에 몸을 나투시어 중생들을 위
2)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 양상과 추이1876년 2월 조선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은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 의도를 숨기기 위해 일본 불교를 이용하였다. 1877년 내무부 오오꾸보토시미츠(大久保利通)는 외무경 테라시마무네노리(寺島宗則)와 함께 대곡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 관장 겐뇨(嚴如)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선에 개교할 것을 의뢰하였다. 일제의 부탁을 받은 본원사는 1차 개교에 공로가 있는 죠신(淨信)의 후예 오꾸무라엔신(奧村圓心)과 히라노께이수이(平野惠粹) 두 사람을 발탁하여 부산에 별원 설치를 명하였다.일본 정부가
판문점 길은 남북의 왕래에 ‘좁은 문’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했다. 휴전 이후 45년 만에 북녘으로 오가는 길이 처음 열렸다. 육로가 아닌 해상로인 뱃길이었다.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유람선 금강호가 강원도 동해항에서 출항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9월 육로관광과 2006년 6월 내금강 관광 등으로 관광코스가 넓혀지면서 2006년에는 관광객이 35만 명에 달했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관광 중단 전까지의 누적 관광객은 196만 명에 달했다.동녘에서 시작한 왕래는 서쪽 편에서 불어온 하늬바람〔西風〕이 일으킨 희소식
698. 보살은 지혜로 우선 스스로 관찰하고, 다시 지혜로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깨닫게〔覺悟〕 한다. - 《수호국계주경 (守護國界主經)》699. 보살은 지혜의 밝은 힘으로 일체의 오염된 법을 모두 능히 깨끗하게 하며, 모든 지혜의 마음에 능히 안주한다. 비록 오욕(五欲)의 즐거움1)을 받으나 항상 범천계(梵天界)에 태어난다. - 《선교방편경(善巧方便經)》700. 모든 보살은 처음부터 모든 지혜의 마음에 안주하여, 모든 오염된 법을 모두 능히 깨끗하게 한다. 좋은 약이 능히 세간의 모든 병고(病苦)를 치료하는 것과 같다. 보살의 모든
봄눈〔春雪〕이 내렸습니다. 순례지를 향해 가는 길가 기슭엔, 헐벗은 가지 사이로 밤새 내려앉은 봄눈이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 흐느적이며 순례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칠흑 같은 어둠이 아침햇살을 이기지 못하듯, 대지를 호령하던 삭풍은 따뜻한 봄기운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아침햇살이 깊은 어둠을 헤집고 새날이 밝았음을 선언하듯, 복수초는 차가운 눈 속에서 노란 꽃망울을 피우며 봄이 왔음을 알릴 터입니다. 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세상을 비관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 작은 몸부림도 언젠가는 어두운 대지를 밝히
108개 암자가 있었던 금강산의 사찰은 6·25전쟁 때 대부분이 파괴, 소실됐다. 이외에 개성과 황해도, 강원과 함경도, 평안도와 평양 등의 사찰 파괴는 전쟁 초기보다 종전을 앞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모든 사암이 파괴된 평양지역을 비롯한 금강산 4대 사찰이던 내금강 장안사와 유점사, 외금강의 신계사 등 숱한 사암들은 미군의 폭격과 방화로 소실되고, 내금강의 표훈사와 정양사만이 부분적으로 피해를 봤다.1951년 5월부터 UN군 예하의 미국 극동공군은 “금강산의 사찰에 인민군이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폭격을 가했다. 금강
1997년도 남북불교 교류는 인도적 식량지원을 기반으로 광폭의 교류가 진행됐다. 중국 베이징과 심양, 도문 등에서 식량지원에 관한 실무회의와 접촉을 가졌다. 특히 분단 52년 만에 처음으로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동시법회에서 남북불교도 공동발원문이 낭독하는 등 불교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북녘동포 돕기를 위한 단체 결성과 더불어 조계종단에서 ‘자비의 탁발’ 시행과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됐다.1997년 5월 6일 서울 봉은사 선불당에서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약칭 불추위)가 발족하고, 그해 5월 31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4년 7월 9일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고함’이란 제하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의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서 김일성 주석이 그해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에 따른 북측의 중대발표는 해방과 분단 이후, 세계 10대 뉴스로 등장할 만큼 ‘역사적 사변’으로까지 회자됐다.이로부터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이 1994년 6월 1일에 지선 전국불교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제안한 ‘94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해외불교도대회’가 8월 15일 남북 공동행사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불
우리나라의 근세 역사에 비운의 인물이 많다. 그중에서도 현대음악의 세계 5대 거장으로 선정된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이 있다.1967년 7월 8일 남측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일명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 East Berlin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 194명이 관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50년 넘게 한국의 공안과 보수 세력들이 끈질기게도 그에게 ‘간첩’ 딱지를 계속 끌어다 붙이고 있다. DJ, 노무현 정부에서도 보수 언론과 단체들에 의해 왜곡과 비판이 가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명
“중 선생, 반갑습니다.”1995년 5월 말, 중국 베이징 하늘은 흐렸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 만났던 남북한의 불교는 4년 만에 이루어진 만남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민족으로서 함께 고민하고 쌓아온 불심의 폭과 깊이는 같았다.그해 5월 22일 오후 베이징시 동쪽의 랜드마크 호텔 서라벌 한식당에서 만나 서로 합장하고 인사하며 악수를 가졌다. “위원장님, 먼 길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말의 화답으로 “법타 선생, 이제 통일 일꾼이 다 되었습니다.” 또 “(심상련 조불련 서기장 등과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은)
1부. 승려의 도성 출입과 일본의 한국불교 점령 1. 도성 출입 금지의 전말과 해제1) 도성 출입 금지의 전말과 해금 논의1895년 4월 승니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 것은 한국 근대 불교의 기점으로 삼을 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존재감이 없었던 불교가 그 자격을 회복하고, 민중포교라는 불교 본연의 임무와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1)조선 초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몰수와 같은 경제적인 배불은 교단 운영에 어려움을 주었다. 그와 함께 국역의 동원과 도성 안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는 불교의 사회
흔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1995년 이후부터 남북 불교 교류는 모두 중국의 베이징으로 통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원래 의미보다 남·북한 교류에서 베이징이란 도시를 활용했다는 뜻이 있다.현대 중국의 심장인 베이징은 북측에서 교류, 회의 장소로 가장 선호하는 도시이다. 남측에서 보면, 국외로 나가지 않고 기회비용이 적게 드는 개성 지역에서 회의하는 것을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불련은 개성보다 금강산 지역, 이보다는 국외를 더 선호했다. 또 남측에서도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1995~96년 큰물 피해 입은 북한, 국제사회에 도움 요청미온적 정부 대신 종교계 중심 민간단체 대북 지원 나서남북 10개항 합의 불구 이행 방안 도출이나 실행은 불발1995년 여름에는 북측이 ‘100년 만의 대홍수’라 불리는 큰물 피해를 보았다. 1995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태풍 쟈니스(JANIS)가 북한 전역에 집중 호우를 쏟아 부어 150억 달러의 재산 피해와 52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했다. 1996년 8월에도 수마가 8개 도, 117개 시·군을 할퀴어 17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1997년에는 큰
1995년 상반기에는 전국적으로 광복과 분단 50년을 기념하는 열기가 솟아올랐다. 국내의 통일 및 시민단체에서는 8월 15일까지 성명서 발표를 비롯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그해 2월 말, 일본 오사카의 고마데라(高麗寺) 김태연 주지가 국내에 들어와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8·15광복 50년 조국통일기원 희생동포 합동위령제’를 열자는 제안은 국내 불교계의 핫 이슈가 됐다.이런 사실은 같은 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불교회의 때, 북측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에게도 전달되어 참가 의사를 확인한 상태였다. 황병대 조불련
1991년에서 1994년까지의 틈새는 컸다. 이때 북한 불교계는 국외를 통한 남측의 접촉 제의를 비롯한 일체 사안에 대해 응대하지 않았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1992년 4월 제2차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종교건물의 신축, 종교의식 허용 보장’(제8조)을 명시하는 등 북측 내부의 질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위별 종교 교류까지 확대되지 못했다.특히, 1993년 3월 12일 조선로동당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에서 평안북도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핵비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