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혼탁한 말세의 중생들은 불교에 대해서 두 가지 집착을 일으키기 쉽다고 한다. 첫째는 부처님께서도 일체 번뇌를 끊고 성불하셨으면서도 끝내 입멸에 들었는데 우리 중생들이 갖은 노력을 다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집착이다. 둘째는 생사는 곧 열반이라고 하여 우리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므로 이제 수행이 필요없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천태학에서
결사(結社)란 뜻을 같이하는 도반(道伴)들이 자기네의 신앙에 대한 수행을 위하여 맺은 단체라는 의미로서 이러한 모임의 사원(寺院)은 사(寺)가 아닌 사(社)라고 불렀다. 주지하듯이 결사는, 불교가 그 시대에 반하여 각종 폐단을 극명하게 노출하는 등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뜻있는 불승(佛僧)들이, 일종의 수행 공동체를 결성하여, 절집 본래의 가풍을
1. 순수,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첫사랑 흔히 잘 생긴 남자를 그리스 조각같다고 한다. 뚜렷한 이목구비, 8등신의 몸에 알맞게 발달된 근육…. 하지만 그리스 조각이라고 하여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 조각 중에서도 최고의 미남이라면 역시 아폴론이다. 태양의 신으로, 음악과 시, 의술과 예언, 궁술까지 관장하는 신이다. 제우스의 아들이며,
지난해 제주도 성당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다가 가슴에 칼을 맞고 죽은 신자에 관한 기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 종교의 신자라면 신에 대해서 정말 회의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칼을 맞고 죽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2. 명차(名茶)의 발전과 변화과정 가. 명차(名茶)와 공차(貢茶) 중국 역대왕조에서 황제에게 바쳐진 조공한 명차들은 그야말로 모두 정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명차(名茶)에 속한다. 이외에도 비록 공품(貢品)의 반열에는 끼지 않았을지라도 중국 전역의 각 차산지에서 생산된 품질이 우수한 차들이 있는데, 모두가 당대(當代)의 문인(文人)과 아사(雅士) 또는 명인(
2014년 제4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에 선정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은 《더 리더(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이다. 영화화돼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던 《더 리더》는 법철학에 대한 심원한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게 저자는 독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뒤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교수로 재
방일(放逸)은 산스크리트어로 쁘라마다(Pramāda)다. 선법(善法)을 닦지 않으려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부처님은 법을 성취하기 위해선 부지런히 갈고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씀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였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담금질하며 억척스레 노력한
293.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낼 때 《불교대전》 및 《화엄경》에 ‘菩薩於生死’라는 부분이 있다. 관련 대목의 게송은 《화엄경》 서두 게송 중 일부분으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菩薩於生死 最初發心時 一向求菩提 堅固不可動 彼一念功德 深廣無邊際 如來分別說 窮劫猶不盡.” 처음 발심하는 부분이며
암두가 손뼉치고 웃으며 "누구도 덕산 못건드려"덕산탁발(德山托鉢) [설봉반두 雪峰飯頭] 설봉스님이 덕산에 있을 때 반두(飯頭 취사담당)가 되었다. 어느날 덕산스님이 바루를 들고 식당에서 나왔다. 설봉이 이를 보고 “스님, 아직 종도 울리지 않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십니까?” 덕산은 아무 말 없이 방장으로 들
교묘대사 때 천사옥대 반드시 착용 신성성 권위 과시 제사권은 왕의 고유 권한…궁궐에 제석천 신궁 마련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보안각서를 쓰게 하고, 예술 총감독으로 도화랑을 임명해 연출하고 마무리한 뮤지컬 ‘천사옥대’가 성공리에 끝났다. 그 결과 상제가 옥대를 줬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저잣거리에 낱장광고와 함께 나돌았다. 멋
56. 덕산선감(德山宣鑒 783∼865 靑原下) 노파의 물음에 눈앞 캄캄 '30봉' 유명 종풍 상징해낭주 덕산의 선감선사는 속성이 주(周)씨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처음에 율장을 연구하고 또 성상학(性相學)에 정진했다. 촉에 있을 때 평소 《금강반야경》을 강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리었다. 이른바 법상
286. 명관(名官)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명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명관이 되는 행을 닦고, 재보(財寶)를 탐하는 사람은 재보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재물을 경영(經營)하는 행을 행한다. 범인은 욕구(欲求)의 선악(善惡)을 막론하고, 그 마음에 먼저 목표를 정한 후에 그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菩提)를 구하는 사람은 보리심(菩提心)을
진평왕 신성성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 경순왕, 왕건 아홉째 딸 맞고 선물로 진상 청태(淸泰) 4년 정유해 937년 5월에 정승(正丞) 김부(金傅)가 금을 새기고 옥을 두른 허리띠 한 벌을 바쳤다. 길이는 10뼘〔圍〕이고 과(銙 ; 장식으로 늘어뜨린 고리)는 62개이다. 이것이 진평왕의 천사대(天賜帶)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그것을 받아 내
어느날 향엄지한선사가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데 비로 쓸어버린 돌멩이가 앞뜰에 나 있는 대나무에 맞아 ‘딱’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활연대오하는 순간이었다. 지한은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 곧 목욕하고 향을 피워 멀리 위산화상있는 곳을 향해 절했다. “화상의 큰 자비는
제4 신앙품(信仰品) 제1장 발심(發心) 279. 다만 중생의 괴로움을 영원히 없애고 세간(世間)1)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발심(發心)2)한다. -화엄경(華嚴經) 280. 바른 가르침을 수지(受持)3)하고 여러 지혜를 닦아 보리(菩提)4)를 증득하기 위해 발심한다. 심심(深心)5)으로 신해(信解)6)하여 항상 청정히 모든 부처님들을 공경, 존중하며 법(法)과
귀교 있던 신원사 부근은 경주 오릉 서남쪽으로 비정 비형, 신라 첫 사찰 흥륜사 지은 뛰어난 건축가일 수도 “신중사(神衆寺) 아니 신원사(神元寺)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봐라.”고 하였다. 황천(荒川)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혜적 선사는 정오에 이르러 승좌해서 대중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게를 남겼는데 이것이 임종게다. 연만칠십칠 무상재금일 年滿七十七 無常在今日 일륜정당오 양수반굴슬 日輪正當午 兩手攀屈膝 내나이 일흔일곱 죽음이 오늘에 왔네. 둥근 해는 한가운데 떴는데 두 손으로 굽은 무릅을 안아보네. 이 게를 남기고 선사는 양팔로 무릎을 껴안은 채 입적했다. 지통선사(智通禪師)란
272. 오직 하나의 불보에 3종의 불신(佛身)1)이 갖추어져 있으니, 첫째 자성신2)이요 둘째 수용신3)이며 셋째 변화신4)이다. 처음의 불신은 큰 단덕(斷德)5)이 있어 2공(二空)6)의 나타남이니, 일체의 부처님들께서는 모두 평등하신 것이다. 두 번째의 불신은 큰 지덕(智德)이 있어 진상무루(眞常無漏)7)하니, 일체의 부처님들께서는 모두 뜻을 함께 하
즉위에 큰 공 세운 노리부 상대등 임명 국정 맡겨 수와 외교 관계 수립…비형랑 진평왕 아들일 수도 여하튼 사촌인 비형랑에게 《삼국사기》 <직관지>에도 보이지 않는 하급 집사를 준 째째한 진평왕은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579년부터 632년까지 재위한다.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
“《선요(禪要)》에 ‘어떠한 것이 진실로 참구하고 진실로 깨달은 소식입니까?’ 하니, ‘남쪽 산에 구름이 일고 북쪽 산에 비가 온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비유하면 자벌레가 한 자를 갈 때 한 번 구르는 것과 같다.” “擧《禪要》云: &l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