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부처님께서 여러 필추(苾芻)1)들에게 이르셨다. “오래 전 과거에 큰 나라의 왕이 있었는데, 이름이 만도마(滿度摩)였다. 아들이 하나 있어, 그 이름이 비바시(毗婆尸)2)였다. 궁 깊숙이 오랫동안 머물러, 궁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였다. 마무인 유아에게 명하여 마차를 준비시켜, 그것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병자 한 명을 보게 되었다
515.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에 계실 때에 성 안에 80세가 다 되어가는 한 바라문이 있었다. 재산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부자였지만, 성격이 완고하고 진리에 어두워서 교화하기 어려웠다. 도리와 덕을 알지 못하고, 무상함도 헤아리지 못했다. 좋은 집을 새로 지었는데 앞 채, 뒤 채, 시원한 누각과 따뜻한 거처 등 동서의 곁채가 수십 채가 되는 굉장한 집이
남산 정일 (南山正日, 1932~2004) 선사께서는 선학원 제15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 당호는 남산(南山)이고, 출가 전의 속명은 ‘이득(二得)’을 쓰셨다. 서울 은평구에서 1932년 음력 2월에 출생, 1956년에 조계사에서 득도 이후, 1963년에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 후 10여 년간 전강(田岡)
효일 범행(曉日 梵行, 1921~2012) 스님은 선학원 설립 이래 17년에 이르는 최장기간 법인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선불교의 맥을 면면히 계승한 우리 시대의 장로(長老)였다.범행 스님은 1921년 음력 2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부친 전주 이(李)씨 경순(景順)과 모친 밀양 박(朴)씨 흥옥(興玉)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가 전 이름은 임배(林培)였다.동갑내기였던 부모는 나이 마흔두 살에 막내아들을 얻었고, 스님은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군인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군복을 벗고, 포목점과 방앗간 등을 운영했다.
504 물은 흘러 항상 차 있지 아니하고 불은 치성하되 오래가지 아니한다. 해는 뜨지만 곧 지게 되고 달은 차게 되면 다시 이지러지니, 영화롭고 권세 높은 이의 무상함도 이처럼 왔다가도 가버리는 것이니라. 〈죄업보은경(罪業報應經)〉 505 옛날에 수행자 세 명이 있었는데 서로 ‘그대들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가.’라 물었다. 한 명이
향곡 혜림(香谷 蕙林) 스님은 불교정화의 시기에 우리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어른 중의 한분이다. 재단법인 선학원 제11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스님의 법호는 향곡(香谷)이고 휘는 혜림(蕙林)으로, 운봉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스님의 문하이다. 스님은 서기 1912년 정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서 출생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속명
491. 수미산은 높고 넓기는 해도 끝내 없어지고, 대해(大海)는 깊고 넓기는 해도 또한 말라붙을 때가 온다. 해와 달은 아무리 밝아도 오래지 않아 서쪽으로 넘어가야 하고, 대지는 견고해서 온갖 것을 싣고 있을 수 있으나 존재의 기간이 다하여 겁화1)가 타오르면 그 역시 무상으로 돌아갈 운명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겪어야 하고,
482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대지가 모두 변해 대해(大海)가 되었을 때, 어떤 눈 먼 거북(盲龜)이 있어서 수명은 무한하고 백 년에 한 번씩 그 머리를 내 놓는다고 하자. 또 바다에 단지 구멍이 하나만 있는 부목(浮木: 물 위의 뜬 나무)이 있는 물결에 표류하며 여기 저기 바람을 쫓고만 있다. 만약에, 이 눈 먼 거북이 머리를
노노당 이대휘 스님은 청담 스님, 영암 스님, 성철 스님 등 근대 고승들의 도반으로 경학에 밝으시고, 계율에 엄하시며, 선화에도 능하신 스님이셨다. 조선 조계종맥의 태고 보우에서 7대 부휴의 정통 맥을 이은 16대 월헌(月軒) 정광(淨光) 선사로부터 법통을 이어 받으셨다. 은사 하정광 스님으로부터 대휘 스님이 받은 전법게(傳法偈)는 다음과 같다. 松鶴千秋月
478. 미란왕(彌蘭王)1)이 나선(那先)2)비구에게 물었다. “사문(沙門)3)도 능히 그 몸을 사랑하십니까?” 나선비구가 말하기를 “사문(沙門)은 그 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되, “사문이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누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며, 먹을 때 좋은 맛을 느끼며 스스로 보호
“한 생각 밝으면 극락이요, 한 생각 어둔 것이 곧 지옥이다.” 근·현대 한국불교에 있어서 한국불교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대의 동원스님은 선학원 제 8대와 10대 이사장을 2번 역임했다. 스님은 1901년 예천군 풍양면 신기리에서 부친 이병규(李柄奎) 공과 모친 이억순(李億順) 여사의 둘째로 태어났다
468 (전회 이어서) 이 몸은 파초와도 같아서 머리에서 발에 이르도록 가죽·살·뼈·골수가 서로 화합해서 몸을 구성했을 뿐, 안에는 실체가 없다. 이 몸에는 강한 힘이 없어서 가죽과 살이 얇게 덮인 것은 칠을 입힌 담장이요, 무성한 털과 머리숱은 땅에서 돋은 풀과도 같다. 이 몸은 독사를 기르면서 그 해를 입는 것과도
청담 순호(靑潭 淳浩, 1902~1971) 스님은 재단법인 선학원 제 7대 이사장과 조계종 통합 종단 제 2대 종정을 역임하셨다. 아명은 찬호(讚浩), 도호(道號)는 올연(兀然), 법호는 순호(淳浩)이고 불교정화운동 시기에는 법호를 청담(靑潭)으로 쓰셨다. 스님께서는 1902년 11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열일 곱 나이에 서당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의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는데, 삼국유사는 단군을 나라의 시조(國祖)로 언급
1.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른바 호부호형(呼父呼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니, 과연 그랬을까? 그랬다. 소설가의 허구가 아니라, 조선의 서얼(庶孼)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였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부르
대열반경 28권 제23 사자후보살품 4 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선정과 지혜를 얻는 일일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대열반에 들어가는 것도 이 선정과 지혜라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과 지혜에 들어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문을 할 때면 항상 선정에 들어갔다가 선정에서 나와서 법을 설하였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에 들
손안의 새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영화 (미국, 2015)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를 입증한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랑이’에 해당하는 것이 화성에 혼자 고립된 상황입니다. 극한의 추위와 희박한 산소, 그리고 부족한 식량과 함께 화성이라는 행성에 홀로 던져진 현실은 분명 호랑이에게
수행자들은 여름과 겨울에는 안거를 하고, 봄과 가을에는 두타행, 즉 만행을 한다. 안거를 할 때나 만행을 할 때 수행자들이 꼭 갖추어야 할 필요한 물건을 도구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도구라는 말이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도구의 본래 의미는 도道,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갖추는 것을 말하는 불교용어이다. 부처님
457 훌륭한 복전(福田)1)에 귀의하면 여러 좋은 결과를 키워 번성2)하게 하고 3독의 과실과 우환3)을 떠나게 되어 티 없는 청정한 바(信)4)이니라. 458 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 마음이 견고히 물러서지 않아 사문행(沙門行)을 잘 지켜 나가고,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널리 펴 중생이 감로미(甘露味)를 얻도록 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