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지금 한국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미와 같은 부류, 부모님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부류는 어떤 보장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직업을 가질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나레이터모델이나 택배회사의 잡역부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갑니다. 토굴 같은 어둡고 좁은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사람과는 단절된 채 그저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배워온 춤인 리틀헝거처럼 굶주림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벤과 같은 부류, 부모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욕망이 부재합니다. 그들은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권태를 느낍니다. 욕망이 없는 삶엔 권태가 생겨나고, 그들은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미를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벤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이렇게 많이 가져도, 너무 없어도 문제인 것입니다. 한 쪽으로 돈이 너무 몰렸고, 그렇게 분배가 제대로 안됐기에 둘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사회라고 이창동 감독은 진단하였습니다.
1. 명차(名茶)의 생태(生態) 중국 속담에 “고산(高山) 운무(雲霧)는 좋은 차를 잉태하고, 좋은 산과 좋은 물에서 명차가 난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소개하면서 문득, 필자가 예전에 본고 편집장의 부탁으로 불교와 연관된 중국의 차문화를 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연재를 마치면서 본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서는 차의 생산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당시엔 중국의 찻잎이 중국 내지 인민들의 음차 소비뿐만 아니라, 해외수출품으로 아주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공내전을 막 종식하고 건국한 중국의 경제는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렇다 할 경제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중국에서 차는 그야말로 서양열국을 향한 유일한 최고의 해외수출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그들을 겨냥한 새로운 향과 맛의 명차 개발에 관심과 노력을 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 제11회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에는 신창명차는 더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속속 탄생하게 되었다.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이 있다.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인데, 세 번째가 바른 말〔正語〕이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각종 매체를 통해 수많은 말이 오가는 현대에서 바르게 말하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때로는 남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칼은 몸에 상처를 내지만, 말은 때로 마음에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낸다. 보이지 않는 말이 날카로운 칼보다 무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입은 날카로운 도끼와 같아서 그 몸을 스스로 깨나니, 악한 말 때문에 사나운 마음을 일으켜 온갖 죄를 늘임으로써, 모든 재앙을 낳게 되는 것”(《제법집요경》)이라고 타이르신 것이다.
1910년 12월 8일 밤, 만해 스님은 불교개혁사상이 담긴 《불교유신론》 원고에 최종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백담사를 떠났다. 그가 백담사를 떠난 이유는 원종(圓宗)의 ‘조동종 맹약’ 때문이었다. ‘조동종 맹약’은 한국근대불교의 최초 종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불교 성향이 강했던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曹洞宗)간의 비밀조약 사건이다. 1910년 10월 초에 원종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불교 조동종의 본부를 찾아가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비밀조약을 맺고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이회광의 행보에 분노한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의 사찰은 조동종 맹약체결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하였다. 만해 스님도 이 소식을 듣고 한국불교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찾는 것에 동참하기 위해 《불교유신론》의 초고를 상좌인 이춘성에게 맡기고 초겨울, 백담사를 떠나 전라도로 향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아왔던 조선불교가 구한말에 나라로부터 종단을 인가 받기 위해 조동종과 비밀조약까지 맺어야 했던 시대 상황과 그에 대항하여 임제종 설립, 사찰령 반대운동, 선맥 계승운동, 교단 개선운동 등 만해 스님을 주역으로 일어났던 불교개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564. 덧없는 허망함을 멀리하지 못해 사리에 어둡게 되니, 이로 인해 원하는 바가 있게 된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원망하거나 친밀이 있게 되어, 미워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게 된다. 그 미움과 사랑으로 인해 칼을 쥐고 서로 맞선다든가, 소송으로 싸운다든지, 아첨한다거나 진실치 못한 말을 하는 등의 여러 악행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라. - 《제석소문경(帝釋
세상의 중생은 은혜 갚는 것을 알지 못해서 서로를 원수 같이 대하며,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여 앞뒤가 바뀌고 미혹되어 어지럽게 하며,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믿는 마음이 없고, 나쁜 친구를 쫓아다니며, 모든 분별하는 마음[慧]1) 을 일으켜 진리에 어두워져서 여러 가지의 번뇌가 가득 차게 된다. 모든 중생이 다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특성을 간파한 한용운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은 원초적 특성으로 영원하리라’ 여겼으며, 오히려 반종교 운동을 펼치는 사회주의자들의 마르크스를 향한 맹목적 믿음이 미신 혹은 광신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역으로 비판하였다. 한용운은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평생 불교의 그늘 아래 자신의 다양한 행적들을 펼쳐 나갔다.
번뇌의 괴로움과 해로움547. 일체중생이 능히 공(空)· 무상(無相)1)을 잘 닦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물결이 센 번뇌의 강에 떠돌게 된다. 저 같은 큰 강은 오로지 능히 몸을 무너뜨리고, 능히 일체 선법을 신속히 멸하지 못하지만, 번뇌의 큰 강은 능히 일체의 몸과 마음의 좋은 법을 무너뜨린다. 저 큰 거친 강은 오로지 능히 욕계의 중인을 빨
543. 불자야, 무명(無明)을 불요일체법(不了一切法)1)이라 부른다. 모든 세계가2) 미혹(迷惑)해서 삼계(三界)의 업과(業果)3)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장(無明藏)4)으로부터 열세 가지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른바 사견(邪見)5), 아견(我見)6), 상견(常見)7), 단견(斷見)8), 계도견(戒盜見)9), 과도견(果盜見)10)
19세기말 20세기 초, 숨 가쁘고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호기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의인 걸사의 포부를 지녔던 한용운으로 하여금 다양한 삶의 경험을 요청하였다. 그는 1905년 27세에 정식으로 출가한 이래 1944년 66세의 일기로 입적할 때까지, 근 40여 년간 선사로든 거사로든 수행자로서의 일생을 산 불교인이자 종교인이었다. 1933년부
536. 이 몸은 오래지 않아서 쇠하고 파괴되어 마침내 소멸되는 것이니, 영원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음으로 변하여 달라지는 모습이다. <지세경(持世經)> 537. 열다섯 가지의 변이(變異)1)가 있다. 분위변이(分位2)變異)라는 것은 영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전후의 모습이 달라져서 각각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현변이(顯變異
543. 불자야, 무명(無明)을 불요일체법(不了一切法)1)이라 부른다. 모든 세계2)가 미혹(迷惑)해서 삼계(三界)의 업과(業果)3)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장(無明藏)4)으로부터 열세 가지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른바 사견(邪見)5), 아견(我見)6), 상견(常見)7), 단견(斷見)8), 계도견(戒盜見)9), 과도견(果盜見)10)
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1911)는 재단법인 선학원 제 13대 이사장 효일 범행스님께서 발행한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1986)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불교운동과 종지 수호의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근대불교의 정신을 각성하게 해준 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rsq
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가 만해 용운스님을 위시로 사부대중의 활발한 참여로 전개되었던 1911년 이래로, 1921년의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과 준공, 1922년의 ‘선우공제회’ 창립을 돌이켜 보건대, 건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절은 참으로 예사롭지 아니하다. ‘
529 옛날 어느 노모가 있었다. 외아들이 병사하자 시신을 묘지 사이에서 둔 채 매우 슬퍼하였다. “이 아이 하나만 믿고 노후를 보내려 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고 죽어버렸으니 나도 목숨을 함께 버려야겠다.” 하고서는 4~5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가엾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묘지로 가셔서 노모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이
백담사에서 심우장까지 유천(만해)이 처음부터 승려가 되기 위하여 가출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출병하여 국토가 외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시국을 지켜보면서, 유천은 삶에 대해 회의하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던 유천은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의지만을 가지고 한양을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한
들어가는 글 제국주의 일본의 강압통치라는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려는 정책에 따라 그 전통성을 잃어버리고 친일적 성향은 기본으로 왜색화 되어버렸다. 이렇게 한국불교의 미래에 짙은 안개가 내려졌을 때, 한국불교의 올바른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던 대표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가 선학원의 창건과 선종 재흥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22 모든 중생들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잘못된 근심에 탐닉하고 있다.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넓은 들판에 다니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긴 것과도 같다. 겁이 나서 달렸으나 의지할 곳 없었는데 빈 우물 옆의 나무뿌리를 발견하고 밑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우물 안에는 검고 흰 쥐 두 마리가 있었고 나무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우물 네 둘레에는 네 마리
2018년 1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8개월에 걸쳐, 총 열여덟 분의 선학원 설립조사 및 이사장 스님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열전을 게재하였다. 현존해 계신 14대 이사장 법원 진제(法源 眞際, 1930~ )은 제외하였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1979-1944)스님을 필두로 남전 한규(1868-1936), 도봉 본연(1873-1949), 석두 보택(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