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교 상황과 종교 인식 근대 한국불교는 기독교의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반종교운동 등에 반응하면서 종교의 의미나 그 역할에 대해서 종래에 비해 한층 더 깊은 해석에 이르고 있었다. 서구 문명을 등에 업고 급속히 성장해 나가는 근대화된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라는 양대 흐름에 직면한 불교계는 그 당시 막 유입된 ‘종교’라
스님께서는 우리 재단법인 선학원 분원인 강남포교원 분원장으로서 최근 세 편의 글을 연거푸 교계매체에 기고하셨습니다. 스님의 오랜 도반인 이사장 스님과 이사회를 비난하는 내용이더군요. 20년 만 쓴 글이 ‘비난을 위한 비난’ 에서 스님의 법명을 검색했더니 책 간행 기사를 제외하면 1996년 4월 이후 지상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 ‘선학원의 미래를 생각하는 분원장 모임’ 결성 때 다시 등장하셨으니 무려 20년 만에 강호(江湖)로 돌아오신 겁니다. 스님께서 돌아오셔서 하신 첫 행보가 “선학원의 탈종단화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는 것이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니 제 표현이 다소 거슬리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글을 보고 든 첫 생각은 ‘과연 이 글에 대응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청맹과니, 후안무치한 철면피, 뻔뻔스럽다, 몰염치한 자들, 이사장의 꼭두각시, 아첨하고 아부하기에 급급한 모리배”라는 악의적이고 자극적 표현을 총동원해 쓴 스님의 글은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님의 글을 읽고 몇 가지 생각이 떠올라 적어봅니다.
596. 만약 단명(短命)할 행(行, 업(業)과 같은 뜻)을 지으면 행한 이후에 단명을 받게 되고, 만약 오래 살〔長命〕행을 지으면 행한 이후 오래 살 명을 받게 된다. 만약 병이 날 행을 지으면 행한 이후 병이 많게 되고, 만약 병이 생기지 않을 행을 지으면, 행한 이후 병이 없게 된다. 만약 천한 행을 지으면 행한 이후 천하게 되고, 만약 귀한 행을 지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계열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술국치 이후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은 자금으로 조선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생존과 문화 창조, 번영과 향상을 성취하려면 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만해 스님은 민립대학 발기 총회가 개최된 종로청년회관으로 향했다. 이날은 제2회 ‘선우공제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선우공제회는 1921년 11월 30일 선학원 상량식 넉 달 뒤,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발기를 위해 모였고, 그해 11월 3일 제2회 임시총회, 1923년 3월 29일 제2회 정기총회, 1924년 11월 15일 제3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선우공제회 발기와 총회, 그리고 정기회의에 참석한 스님 명단을 검토해보면, 만해 스님은 제2회 정기총회를 제외하고 주요 회의에 모두 참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우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임시의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임원 선거 결과 수도부 이사로 선임되었다. 결국 민립대학 발기총회에 참석하느라 만해 스님이 선우공제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명단에 빠진 제2회 정기총회는 1923년 3월 29일에 열렸는데 같은 일자 신문보도에 ‘금일 민립대학 발기 총회’란 제목의 기사가 있다. 당시 고등교육을 향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전국 각지의 모금과 여러 계층의 관심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학생을 위한 전문대학과 종합대학교가 한 곳도 없었던 까닭에, 5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후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편제로 개편)를 졸업한 조선학생이 대학에 가고자 한다면, 일본 중학교부터 다시 입학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일반 가정에서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동규 | 신라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과 겸임교수
경전에서는 ‘중생은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불성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불성에 세 가지〔三身佛性〕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신불성은 삼인불성(三因佛性)이라고도 하는데, 정인(正因)·요인(了因)·연인(緣因) 불성(佛性)으로 분류된다. 정인불성은 온갖 중생이 다 가지고 있고, 일체의 삿된 것을 떠난 중정(中正)의 진여로서 이것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 요인불성은 진여의 이치를 비추어보고 도달하여 깨닫는 지혜를 뜻하며, 연인불성은 지혜를 도와서 정인불성을 개발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을 뜻한다. 성인(聖人)은 스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바로 안다고 한다. 그 불성이 정인불성(正因佛性)이다. 이에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 불성 중에서 요인불성(了因佛性)이나 연인불성(緣因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인불성은 진여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이니 지혜의 안목을 얻어야 정인불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연인불성은 불성을 비추는 지혜를 일으키는 모든 선행이니 선근 공덕을 쌓아야 요인불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판옵티콘 장치’는 ‘바라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그 권력의 근원은 어떤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서,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 군주가 최고의 권력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예식이나 의식, 표지 등은 쓸모없는 것으로 된다. 오직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차이를 보장해 주는 장치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걸려든 그 누구라도 이 기계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쉽게 작동시킬 수 있는 장치, 그래서 언제라도 작동되고 있다고 믿게 되는 장치가 판옵티콘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판옵티콘 장치 속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분명 그 속에 태어났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은 결코 인식의 주체가 아니다.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인간은 먼저 어떤 체제 속에 태어나고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체제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가치를 내면화하고, 체제를 위해 봉사한다. 예컨대 현재의 우리들에게 ‘성공=부’라는 등식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현대인은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넓은 집, 고급 차를 소유한다. 따지고 보면 집과 자동차 등을 소비하기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집도 자동차도 없이 가난하게 살지라도 게으름 피우며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체제는 ‘부=성공’과 동시에 ‘가난=실패’라는 등식을 만들어 낸다. 학교에서, TV에서, 드라마, 영화, 책 속에서 이런 등식이 간단없이 되풀이 된다. 은밀하면서도 정교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주눅이 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느끼며 가난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부자가 되어 당당하게 남 앞에 서고자 악을 쓴다. 따지고 보면 가난이 뭐 대수인가. 덜 벌면 덜 쓰면 된다. 옛 선사들은 무소유를 지향하였다. 그들은 헤진 누더기에 바리때 하나면 충분하였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영혼들. 하지만 이들마저 어느새 추방되고 없다. 정말로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예전보다 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운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운동은 움직이는 것이다. 몸은 늘 동정(動靜)이 함께 하기 때문에 몸이 바쁘게 움직이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따라서 운동을 하면서 얻는 것은 육체의 개운함도 있겠지만, 정신의 해방감도 크다. 이번에는 시간으로 생각해보자. 운동은 근
마냥 기쁠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큰 기대를 했던 만큼 부담도 컸던 모양입니다. 동생은 마치 히말라야를 천국처럼 말했는데 여행 준비를 하면서 그 천국에 대한 회의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산증이 두려웠습니다. 고산증은 해발 3000m쯤 위치한 ‘데우랄리’라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두통을 앓거나 불면증, 어지럼증, 심할 경우 호흡곤란을 겪으며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 글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눈사태로 사망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히말라야에 대한 두려움이 슬금슬금 올라왔습니다. 광저우에서 카트만두 갈 때 생긴 갑작스러운 두통은 이런 부담감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동생이 말한 천국에 가면서 난 심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고산증에 대한 두려움, 겨울이니만큼 눈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긴 것 같은 찜찜함, 과연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등, 산에 오르기도 전에 걱정이 너무 많았습니다. 천국에 가면서 걱정을 한가득 안고 간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는 경고였는지 갑작스럽게 두통이 생겼던 것입니다. 카트만두 공항에서 만난 불상을 향해 무사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SKY캐슬〉은 우리나라의 부모·자식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무조건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열 달을 뱃속에 품으며 나의 숨을 받고, 내 먹은 음식을 먹고, 내가 자면 휴식을 얻던 존재.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에게만 알릴 수 있던, 온전히 내게 기대던 존재. 하지만 아기에서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엄마는 점점 자식에게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 성인이 되면 엄연한 한 개체가 되어 살아간다. 이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을 내어주고 지켜봐주는 것은 어느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통틀어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모정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걸까? 모든 모정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 소개하는 두 영화는 이 질문을 화두로 한다.
차나무는 생장, 발육 과정에서 대량의 수분을 필요로 한다. 차나무가 생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과 생태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의 주요 공급지는 토양의 수분이며, 일반적으로는 전답(田畓) 용수량의 70~80%가 차나무 생장에 가장 적합하다. 수분은 차나무의 신진대사를 정상화할 뿐만 아니라 갓 돋아난 차싹이 머금을 영양소의 형성과 저장에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차밭의 공기 중에 습도가 많으면 자주 운무가 생긴된다. 운무는 차밭의 내리쬐는 햇볕의 광질(光質)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간접광(間接光)’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하며, 차나무의 광합성작용에 아주 유리하여 관목형 차나무의 찻잎을 부드럽게 하고 탄성을 높이는 데 좋다. 차나무에 직사광선이 비치는 것은 차나무 생장, 발육에 금물이다. 그래서 반사광(反射光)을 통해 간접적으로 빛을 들게 하여야한다. 명차가 재배되는 지역은 대부분 강우량이 풍부하고 날씨가 비가 오다, 개다를 자주 반복하여 상대적으로 공기 중의 습도가 많은 편이다. 아울러 그곳의 토양은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차나무의 생장이 왕성하며, 카페인과 방향물질의 함량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므로 차를 만들었을 때 향기는 좋고 많이 순후(醇厚)하여, 품질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올해는 조선 민중이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선언한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재단법인 선학원의 설립조사인 만해 한용운 스님이다. 스님은 3·1운동을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의 행동강령이라 할 공약삼장을 직접 추가해 넣었다. 선학원의 설립은 간악한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민족불교의 전통을 지켜내려는 노력의 산물이지만, 한편으로는 3·1운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3·1운동으로 수감된 만해 스님이 풀려나게 되자 스님을 중심으로 친일을 일삼던 사판계에 맞서고자 이판계의 수도원으로 설립된 것이 선학원이다. 출옥한 만해 스님은 선학원에 머물면서 선리참구와 항일운동, 불교활동, 계몽활동, 문학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고, 선학원의 설립조사들은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정책에 맞서 한국선불교의 전통을 지켜냈다. 최근 일부 단체가 선학원 설립조사인 만해 스님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있다. 만해 스님 선양사업이 선학원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거나, 만해 스님을 ‘선학원에 얹혀살던 식객’이라고 폄훼하는 것 등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학원의 역사와 설립 정신을 왜곡해 이해한 데서 벌어진 일이다. “풍란화 매운 향기 님에게 견줄쏜가 /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가 만해 스님을 추모하며 지은 시조이다. 일제의 간악한 탄압에도 타협하지 않고 당당히 정진해간 만해 스님은 선학원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이다. 스님의 생애와 사상, 수행을 잇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재단법인 선학원 구성원의 도리이자 책임이다.
제5장 인과(因果) 582. 그 때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모든 중생들의 4대(四大, 육신을 구성하는 地水火風)가 평등하고 ‘나’라든지 ‘내 것’이 없는 것일 터, 어찌하여 어떤 이는 괴로움을 받지만 어떤 이는 즐거움을 받고, 어떤 이는 단정하지만 어떤 이는 누추하고, 어떤 이는 지금
1920년대와 30년대를 선학원에서 주석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던 만해 스님의 당시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독립운동 일지를 남길 수 없는 사회 상황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일경의 감찰기록 내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겠다.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에 대한 일제 학무당국의 가혹한 처벌문제를 두고, 스님은 이를 신문지상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스님 역시 6·10 만세운동과 대동단 의거로 선학원에서 일경에 사전 검속되어 고초를 치른 이후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밝힌 스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568. 장님은 좋거나 나쁜 빛깔, 평지나 높은 언덕 기슭을 볼 수 없다. 중생도 그러하여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덮여 있다. 선악의 행위를 분간할 줄 모르거니와 좋고 나쁜 것의 구분이라든지 검거나 흰 것에 대해 구분하지 못한다. 마음은 어리석어 선처(善處)를 구하려 하지 않기에 세상은 온통 깜깜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니. - 《출요경(出曜經)》 569.
한국불교 법맥과 전통에 입각한 임제종 1911년은 임제종 운동과 함께 시작된다. 만해 스님은 이회광의 맹약으로 한국불교가 일본 조동종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해 스님은 1911년 1월 6일 증심사 특별총회를 열었고, 그 이후 박한영 스님과 송광사, 백양사, 범어사, 통도사를 넘나들며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
《열반경》에서는 우리가 닦아야 할 수행으로 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지(止), 관(觀), 사(捨)로 번역되는 이 수행의 삼총사는 지혜와 선정과 평등심으로 해석하며, 대열반에 들어가게 하는 중요한 수행이다. 어느 날 사자후 보살이 부처님께 사마타·비파사나·우필차를 닦아야 할 때를 질문하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안락을 받는다고 교만을 내거나, 법을 설해준다고 교만을 내거나, 정근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이치를 잘 알아서 문답을 잘 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혹은 악지식을 가까이 하면서 교만을 내거나, 귀중한 물건을 보시한다고 교만을 내거나, 세간에 선공덕을 짓는다고 교만을 내거나,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공경을 받는다고 교만을 내는 등의 경우에는 지혜(사마타)를 닦지 말고 선정(비파사나)을 닦아야 할 줄 알라. 이를 보살이 때와 때 아닌 것을 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문종 29년(1075)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일을 잘 알아, 학사들의 신망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1)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부려먹은 나라였다. 단지 죄지은 자만을 노예로 삼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식도 노예로 만든 야만족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5백년을 넘겨 지속되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송익필은 이런 야만의 나라에 태어나 천부의 재능을 마음껏 펴보지도 못한 채 죽은 한 사람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그는 하필이면 캄캄한 그믐에 태어나 빛다운 빛 한 번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것인지 모른다. 조선을 비껴서 태어났더라면 불세출의 영웅이나 최고의 현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한 때 파주에는 송익필, 성혼, 이이가 만나 하ㆍ은ㆍ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이상 국가를 꿈꾸고 설계하였다. 이들은 신분의 귀천도, 가문의 존비도 따지지 않고 다만 같은 시대를 살며, 시대의 아픔을 나누었다. 그들의 우정은 서로를 일깨워주고 서로를 키워주며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서른 밤에서 하루 밤 보름달처럼 그렇게 밝게 어둠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