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정취에 취한 채 1시간 30여분을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3백 미터나 되는 출렁다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건물 5층 높이에, 아래로는 거세고 깊은 물이 흐르고, 거기다 계속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위를 15분가량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2층 올라가는 것에도 공포를 느꼈고,
다이어트의 가장 큰 원칙은 적게 먹고 많이 활동해서 몸에 저장된 칼로리를 소모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큰 적은 우리 몸이다. 왜냐면 몸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늘 능동적으로 평형을 맞추어 가는 특성이 있기도 하고, 밖에서 들어온 에너지는 최대한 흡수해서 아껴 쓰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이런 본능 말고 습관이나 의식도 다이어트의 적이 될 수 있다. 적게
《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은 즉 동진의 함안2년으로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스님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보냈다.(당시 부견은 관중 즉 장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또 4년 갑술(374)에는 아도가 진나라로부터 왔다. 이듬해 을해(375) 2월에는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배치하고 또 이불란사
“1924년, 나는 《중국선학사(中國禪學史)》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혜능까지 써내려가다가 펜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송고승전》에서 신회가 북종(北宗)과 대결한 기록을 보았고, 또 종밀의 저서에서는 ‘797년 칙명이 있어 신회를 7조로 했다.’는 부분을 읽었다. 어떻게든 신회에 관한 자료를 찾아야 했다.&r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예술은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자기 안의 위대한 본성을 일깨워 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현재의 삶에 자유를 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실제로 예술은 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풀려나 좀 더 관조적으로 세상을 보길 권한다. 현실과 떼어놓음으로서 더 객관적으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비름나물은 여름이 제철인 나물(채소)이다. 시장에서 흔히 ‘비듬’이라 잘못 불리기도 한다. 사실 비름나물은 나물이라기보다는 뜰이나 밭둑, 논둑, 벌판에서 쑥쑥 자라서 잡초로 취급받기도 한다. 자라면서 하얀색 가루 같은 것이 잎사귀에 생겨 물로 씻으면 흰색 가루가 둥둥 뜬다. 때문에 아직도 비름을 잡초 정도로 여기고, 비름의 효용을 모르
수륙재는 505년 황제보살이라 알려진 양나라 무제(武帝:464~549)에 의해 처음으로 설행되었다. 《불조통기(佛祖統紀)》 권 33에 나온 수륙재의 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양 무제가 어느 날 법운전(法雲殿)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서 ‘황제께서 발심을 하셔서 많은 사찰을 짓고 불탑을 쌓고 경전
벽화는 마야부인의 태몽을 그리고 있습니다.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이신 호명보살이 상아 여섯을 가진 흰색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타고 초록 홀을 양손에 받쳐 든 인물이 호명보살입니다.인간의 역사에 부처님의 자비행이 시작되는 거룩한 서사의 첫 장면입니다.
나는 만해를 안국동 선학원으로 찾아간 일이 있다. 마주 앉아 점심으로 상치 쌈을 먹는데 만해가 말했다. “원, 세상에 육법전서를 읽어가며 독립운동 하는 꼴은 처음 보았으니 한 번 들어보오.”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동지들이 모두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인데 허헌(許憲)이 육법전서를 차입시켜 열심히 읽고 난 후 같
제 6 자치품(自治品)제1장 학문(學問)제1절 수학(修學)635. 일체법은 한량이 없으니, 배움을 쌓아 바야흐로 능히 깨달음에 들어가야 한다. 빗방울이 떨어져 빨리 흐르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점차 모인 까닭이다. 시작도 없는 윤회의 바다에서 보리 심을 일으켜 금강도량에서 불과(佛果, 깨달음) 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다. 《제법집요경(諸法集要經)》636. 좋
“입은 날카로운 도끼와 같아서 그 몸을 스스로 깨나니, 악한 말 때문에 사나운 마음을 일으켜 온갖 죄를 늘임으로써, 모든 재앙을 낳는다.”는 《제법집요경》의 말씀처럼 나쁜 말은 남보다는 자신을 더 파괴한다. 가짜뉴스도 다를 리 없다.“모든 등불 가운데 진실한 말의 등불이 제일”(《정법념처경》 )이라 했다. 말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나도 남도 고통 받지 않는 말, 도리에 맞는 말, 애정이 담긴 말, 진실한 말을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경주 남산 탑골 옥룡암에는 네 면에 불보살과 비천, 스님, 사자, 탑 등을 가득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두 그루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는 승려상’은 이 바위 동쪽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리수 아래에서 목숨을 건 수행 끝에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옛날 통일신라시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로 1985년 승려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다. 서양종교의 유입과 일본불교의 진출이 이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불교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킨다.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우고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두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토록 한 것이다.원흥사(元興寺)는 당초 대한제국 황실과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
▲ 선암사 숲길. ▲ 선암사 숲길. ▲ 선암사 숲길. ▲ 선암사 강선루 옆 각석.
승객 서넛을 태운 시내버스는 크고 작은 산과 들판 사이를 내달립니다.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오는 새벽 공기가 꿈길을 헤매던 머릿속을 맑혀줍니다.한 시간 남짓 달린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남도 삼백리길 노선도’가 버스에서 내린 순례자를 반깁니다. ‘남도 삼백리길’은 느릿느릿 걸으며 남도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입구 맞은편 벽면에 걸려 있는 ‘禪學院’이라고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편액 왼쪽에 ‘세존 응화 2949년 임술 정월 일 김해강 서’라고 씌어 있어 일제 강점기인 1922년 정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선학원이 일제에 부역하는 사판승에 맞서 이판승의 수도도량으로 설립된 때가 1921년 10월이니 이 편액은 선학원과 역사를 함께한 뜻깊은 유물이다.글씨를 쓴 해강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활약한 서화가다. “전(篆), 예(隷), 해(
621. 모든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삶과 죽음을 이어온 것은 모든 진실 된 마음과 본성이 깨끗하고 밝은 본체에 항상 거함을 알지 못하여, 일체의 망상을 부리고 또한 이러한 생각이 참되지 못하여 윤회하게 된 것이다. 《능엄경(楞嚴經)》 622. 선남자야! 일체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갖가지 은애(恩愛)와 탐욕(貪慾)을 일으키므로, 윤회하는 것이다.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은 선학원 창건 1백주년에 즈음하여 완공된 건물이다. 그래서 이 기념관을 가리켜 불교계에서는 그 애칭으로 선학원 백주년 기념관이라 부른다. 선학원의 상량식은 만해 스님 출소 직전인 1921년 11월 30일에 봉행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인 1921년의 일이다. 상량식 봉행의 네 달 후,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올봄이 첫 악수를 건넬 무렵 하동 쌍계사를 찾았다. 매화 향에 취해 경내를 거닐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의 머리를 모셔두었다는 금당이었다. 금당 안에는 7층으로 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있는데 만약 혜능의 등신불이 중국에 있다는 사정을 아는 이라면 이 탑의 내력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중국 남화사에 모셔진 혜능은 그 모습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시각으로 따지자면 남화사의 미라가 혜능이 아니든지 쌍계사 금당에 육조의 머리가 없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있음의 반대가 없음이고, 사실의 대척점에 허구가 있다고 확신하는 태도는 불교적 사유는 아니다. 모든 현상이 실체가 아님을 아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라 말하는 《금강경》의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진실과 진실이 아님을 애초에 분할할 수 없다는 안목으로 보아야 육조정상탑은 물론 혜능에 관해 내려오는 다양한 이야기 또한 불교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구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그러나 어리석고 미혹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구나.” - 《화엄경》 〈여래출현품〉 부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하심은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기쁜 일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의 참다운 가치와 존엄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다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후, 크게 외친 말씀은 “사람이 부처이다”.(一切衆生 悉有佛性)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