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대웅전은 맞배지붕 건축이라 좌우 벽에 큰 화면이 나타납니다. 우측 벽엔 동방 약사여래삼존벽화를, 좌측엔 서방 아미타삼존벽화를 그려 뒀습니다. 사진은 약사여래삼존도의 부분입니다. 1713년에 단청 빛을 입힌 300여 년 전의 벽화입니다.
올해도 새호리기 수컷이 일찌감치 까치집을 차지하고 암컷에게 구애한다. 새호리기 수컷은 구애할 때 자신이 가장 강하고 사냥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공중에서 다른 종류의 새를 사냥하고 그 사냥한 먹잇감으로 암컷을 유인하면서 줄듯 말듯 다투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다 암컷에게 강한 자신감을 인정받게 되면 짝짓기를 한다.
우리나라 기후가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하고 있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 계절이다. 이렇게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시원한 오이냉국 한 그릇으로 갈증을 달래고 잃은 입맛까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오이냉국을 소개한다.사람들은 누구나 춥거나 더워지면, 그때에 맞는 음식부터 챙겨 먹으려 한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열치열’이라는 말은 더
안나푸르나산 롯지에서 다섯 밤을 잤는데 밤마다 이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원래는 약간 여유 있게 6박 7일 일정으로 천천히 히말라야를 만끽할 생각이었는데 추위가 너무 지긋지긋해서 서둘러 하루를 앞당겨 5박 6일만에 베이스캠프를 찍고 급하게 내려왔습니다.
아도기라(阿道基羅)아도를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 제4에 전한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려(高麗)[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구미 선산]에 이르렀다.아도의 한자 표기가 다르던가 또는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은 이름을 부정확하게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역사서
마조가 마조로 불리게 된 것은 본인의 덕이 아니다. 혜능과 신회의 관계에서 보았듯 스승의 이름은 후대의 뛰어난 제자가 드높이는 것이다. 마조 아래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백장회해, 방거사 등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은 선불교의 거목들이 모두 그의 문하였다.
‘체했다’의 반대말이 ‘통했다’이고, 체했다는 말이 작게는 소화불량이지만 크게는 몸의 순환장애를 뜻한다. 뭔가 술술 통하고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막혀서 통증이 있거나 답답할 때를 일컫는다.
다가올 5G시대에, 특히 젊은 층으로 불교를 전파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작업해야 할 것이 ‘붓다’와 ‘다윈’의 만남이다. 책을 번역하고 출판한 이재석 대표는 "진화심리학이라는 과학의 렌즈에 비추었을 때도 불교의 제안이 진실에 가까움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시작한 ‘자비’라는 단어가 ‘이타심’이라는 말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상이다.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경제’에도 이타심이나 공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불평등의 심화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해결하는 방안에 전문가들이 머리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656. 배움은 당연하게 이해할 것이 먼저 요청되며, 그 다음에 옳고 그름을 관찰해서 분별해야 한다. - 《법구경(法句經)》657. 어떤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서 아무리 많이 외우고 널리 배운다 하더라도,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글의 뜻과 말의 의미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초목을 많이 져 날라 백 천 짐에 이른다 해도, 애만 썼을 뿐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다. - 《출요경(出曜經)》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를 살며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던 삶의 터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한 만해는 자신의 사상을 고답적인 이론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낸 한 근대 불교계 지성인이었다.은산철벽 같은 식민지 상황 속에서 대장경의 숲을 헤치며 자신을 연단하듯 인고의 시간을 보낸 만해가 집대성한 《불교대전》의 시대성이나 역사적 의의 등은 앞으로 활발히 개진되어야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앎과 삶의 조화를 이루며 수행자(禪師), 종교인으로서 삶의 전범(典範)을 보여 주었던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은 다문화, 다종교 상황이라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묵은 것과 새로운 것, 뿌리 내리고 있는 것과 새롭게 이식되는 것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나 당대 문화에 합당한 몸짓으로 거듭나 창조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해의 치열한 자기 쇄신의 모습은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진정한 종교인, 사상가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전국 72개 사찰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이회광은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6일 조동종과‘연합맹약 7개조’를 체결했다. 맹약은 겉으로는 연합을 표방했지만 실제 내용은 예속이었다.이회광은 귀국 후 전국 주요 사찰을 방문해 대등한 관계에서 맹약을 체결했다며 동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원종 종무원 서기가 조약 전문을 통도사에 전하면서 대중의 분노를 샀다. 맹약의 실체를 확인한 승려들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으로 개종시키려는 음모이며, 우리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소행”이라고 분개하고, 일본불교에 복속시키려는 조동종과 이회광의 마수로부터 조선불교를 지키려는 보종(保宗)운동을 전개한다. 그 결실이 조선불교임제종 운동이다.
심우장은 재단법인 선학원 설립 조사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지난 4월 8일 국기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지정됐다.단정하고 온화하면서도 고고한 ‘심우장(尋牛莊)’ 편액은 만해 스님이 서재로 쓰던 심우장 오른쪽 방 방문 위에 걸려 있다. 이 편액은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98)이 쓴 편액이다.일창은 한국 근·현대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교육자, 시조시인이다. 초서(草書)에 독보적인 경지를 일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창은 생전에 “초서는 동글동글, 한 군데도 모가 나선 안 된다”며 자신만
▲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는 원효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 경주 황룡사지 금당지에서 바라본 분황사 원경. 원효 스님은 황룡사에서 왕과 대신, 여러 승려에게 《금강삼매경》을 강설했다.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황복사는 의상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전 홍유후 설총 묘((傳 弘儒侯 薛聰 墓)
“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은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을 오래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진실로 밝지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의상 스님이 왕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삼국유사》 조에 전하지요. 왕은 스님의 편지를 받고 역사를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스승의 충언을 귀담아 듣고 실행한 문무왕이기에 병기와 투구를 이 깊은 산중에 감추어 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삼층석탑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아 석탑을 바라봤습니다. 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기를 묻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일구겠다”고 다짐하던 문무왕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줌 햇볕은 대낮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작은 촛불은 칠흑 같은 어둠을 환히 밝힌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작은 결심이 큰 빛을 발한다. 삶이란 끊임없이 배워가는 여정이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평생을 번뇌 속에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법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시절의 조류에 몸을 맡기는 것은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물결 따라 흘러가는 죽은 물고기의 삶과 같다.고된 삶이 눈앞에 놓이고 온갖 욕망이 유혹하여도 게으르지 않고,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삶이다.
648. 부처님의 깨달음〔佛菩提〕을 구하려 하는 사람은 마땅히 네 가지 법을 배우고 수행해야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차라리 몸과 목숨을 잃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착한 벗을 가까이해서, 차라리 몸과 목숨을 잃을지언정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인욕과 온화함을 닦아서 차라리
《불교대전(佛敎大典)》(1914)은 한용운 불교사상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불교대전》을 독해하는 하나의 쟁점으로 《조선불교유신론》과 얼마나 유기적 관련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불교대전》이 일반적 경전과 달리 근대불교라는 시대적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대전》의 집필 배경으로써 《조선불교유신론》과의 상관성 및 《불교대
우리 재단은 사찰을 등록할 때 분원장 스님으로부터 ‘등록 이후에 형성되는 사찰재산을 재단에 추가 증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원의 재산이 개인명의로 되어 있을 경우 우리 재단은 그 재산이 영구히 존속될 수 있도록 지켜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유실된 사례들이 제법 있습니다.다른 하나는 횡령이나 배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법조인은 “사찰을 등록한 이후 사찰이 취득한 재산은 사찰의 운영이나 사찰에 대한 신도들의 시주 등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이는 당연히 사찰의 재산이다. 이를 주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횡령이나 배임에 해당하므로 재단이나 종단에 증여하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기사에서는 이걸 을 개정해 강요하는 것처럼 ‘강제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악의적이지요.
봄이 아직 깊어지지 않을 무렵의 새벽은 푸르스름한 하늘빛과 코끝이 차가운 바람결이 골골에 남아서인지 제법 두툼한 겉옷을 걸치고 뒷동산에 올랐다. 지대가 높지 않아서 꼬마산이라고 할 정도라 여느 등산하고는 다른 발걸음을 내딛는다.내가 살고 있는 성미산자락의 마을은 창문을 열면 산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숲향이 집안 곳곳에 바람 타고 들어와서 여기가 도시인지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