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이란 우리 중생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집착 근심 걱정이 사라진 청정한 경지, 지혜를 닦고 수행을 쌓아서 완성되는 깨달음의 세계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와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라고 한다. 생사의 번뇌로부터 떠나 있어서 지극히 고요하고 청정하고 안락한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업을 지어서 후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악업을 지었으면 이를 고뇌하고 후회하며, 선업을 지었으면 만족하고 안락을 얻는다. 곧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고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악업을 짓지 않도록 마음과 행을 닦으라는 뜻이다. 불도에 가는 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열반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마
요사이 우리 주변에서는 고승들의 탄신하신 날 혹은 입적하신 날 그분들 생전의 생생한 모습과 육성을 영상물로 다시 보고 추모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는 어떤 목적에서 미리 촬영한 것으로,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위해서 보이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고인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우리가 여래를 보고자 하거나,
보살이 《열반경》을 닦으면 혜안이 열리고 법안이 열려서 마침내 불성을 보게 되는데, 불성을 보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살일 때에는 열 가지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아서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완전히 성취되면 불성을 분명히 보게 된다고 한다. 열 가지 법이란 곧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며, 고요하고 적정하며, 정진을 하며,
《열반경》에서는 흔히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여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불성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열반경》에서는 그 이유를 일곱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에게 다 불성이 있는 것이 금강역사가 눈앞에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라고 한다. 《열반경》에 <사자후보살품>이 있는데, 이 품에는 사자후보살이 부처님의 사자후 법문을 질문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사자후 법문을 닦게 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자후법문이란 첫째 중생에게 마군을 파하고 부처의 십력(十力)을 보이는 법문을 하며, 둘째 부처님의 행하는 법을 나타내어 보여서 사견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바를
《열반경》에서는 대열반을 얻는 열 가지 공덕을 밝히고 있다. 보살이 대열반에 들어가는 열 번째 공덕은 이 경을 믿고 공경하여 삼십칠조도법을 닦으면 상(常)·락(樂)·아(我)·정(淨)에 들어가고,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할 때 이 경을 믿고 공경하는 자는 불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의 열 번째 공덕은 《대열반경》
지난 호에 《대반열반경》을 닦는 보살들은 다섯 가지 마음(믿음이 있어야 하고, 곧은 마음[直心]을 내야하며, 계행을 갖추어야 하고, 선지식을 친근해야 하며, 많이 알아야 한다)을 성취해야 한다고 했다. 대열반을 얻기 위해 힘쓰는 보살들은 난행 고행의 보살도를 닦아야 한다. 열반을 얻는 보살도가 어찌 쉬운 일만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살들은 위의 다섯 가지 마
보살마하살이 《대반열반경》을 닦아 아홉째 공덕을 성취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마음을 내어야 한다. 곧 믿음이 있어야 하고, 곧은 마음[直心]을 내야 하며, 계행을 갖추어야 하고, 선지식을 친근해야 하며, 많이 아는 것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믿음을 내야 한다. 믿음이란 삼보를 믿고, 보시에는 과보가 있음을 믿어야 하며, 이제(二諦)의
보살이 미묘한 《열반경》을 닦아서 여덟째 공덕을 잘 성취하려면 다음의 아홉 가지를 잘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다섯 가지를 잘 끊어야 하고, 둘째 다섯 가지를 멀리 떠나야 하며, 셋째 여섯 가지를 성취하고, 넷째 다섯 가지를 잘 익혀야 하며, 다섯째 한 가지를 잘 수호해야 하고, 여섯째 네 가지를 친근해야 하며, 일곱째 한 가지를 한결같이 믿고 순종하며
무엇을 열반이라 하는가. 우리는 일체의 번뇌를 끊음을 열반이라고 하고, 부처님이 입멸에 드는 것을 열반이라고도 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다양한 법문으로 답하고 있다. 우선 문자적인 풀이로는 ‘열(涅)’은 ‘아님〔不〕’이란 뜻이고 ‘반(槃)’은 ‘멸한다’
열반에 가까이 가는 네 가지 일은 첫째,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일, 둘째,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일, 셋째, 마음을 두어 생각함, 넷째, 여법하게 행을 닦는 일다. 이번 호에는 그 둘째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일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생들이 부지런히 법을 들으면 신근(信根)을 구족하게 되며, 신근을 얻으므로 보시·지계·인욕
《열반경》을 실천하여 얻는 일곱째 공덕은 열반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일[四事]이다. 열반을 얻는데 있어서 이 네 가지 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곧 첫째는 선지식을 친근함이고, 둘째는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들음이며, 셋째는 마음을 두어 생각함이고, 넷째는 여법하게 행을 닦음이다.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네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첫 관문
대반열반에 들어가는 가까운 인연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법을 들고 있다. 첫째는 선지식을 친근함이요, 둘째는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구하여 들음이며, 셋째는 마음을 두어 생각함이고, 넷째는 법에 맞게 수행함이다. 경에서는 네 가지 법을 실천하는 보살과 범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비유한다. 첫째는 《열반경》을 닦는 보살이 자기 스스로의 행[自行]으로 네 가지
《열반경》의 다섯째 공덕은 이 경을 닦아 익혀서 얻는 다섯 가지 과보와 공덕이다. 먼저 다섯 가지 과보란 보살들이 이 경을 실천하여 얻는 훌륭한 다섯 과보를 말한다. 첫째는 모든 근(根)이 구족하게 되므로, 사람들이 올바른 육근의 안목을 가지고 올바르게 대상을 인식하게 됨을 말한다. 둘째는 변지(邊地)에 나지 않으니, 좋은 업을 지어 불법과 항상 가까이 할
《열반경》을 닦으면 원만한 자애심이 생긴다. 경에서는 보살이 《열반경》을 닦으면 치우친 자애심에서 원만한 자애심을 얻는다고 한다. 자애심은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사무량심 중 첫째 마음이다. 자애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는 마음이다. 곧 이 경을 열심히 닦으면 자애심으로 중생을 안락하게 해준다는 것이
《열반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면 어떤 공덕이 있을까. 경에서는 다섯 가지 신통력이 생긴다고 한다. 곧 “예전에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예전에 이르지 못하던 데에 이르며, 예전에 듣지 못하던 것을 들으며,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며, 예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안다”는 것이다. 《열반경》을 수행하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섯
부처님은 상·락·아·정의 대열반에 들어 계시니, 무위법신을 얻어서 두 가지 생사를 받지 않음이 크게 영원한 경지〔大常〕이고, 불가사의한 팔자재의 크게 자재함이 대아(大我)이며, 끊임없는 즐거움과 크게 고요함이 큰 안락함〔大樂〕이고, 몸과 마음과 업이 크게 청정함이 크게 청정함〔大淨〕이라 한다. 이러한 무량한 열반(涅槃)
삿된 생각으로 일어나는 번뇌, 염루(念漏)와 생사 염루란 칠루(七漏)의 하나로, 중생들이 염혜(念慧)가 없어서 갖가지 번뇌를 내는 사념(邪念)을 말한다. 우리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대상들에 대해서 바른 지혜가 없으면 삿된 생각이 일어난다. 중생들이 그동안 익혀온 습성으로 바르게 보지 못하고,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맛보지 못하는 등 바른 지
불성을 가리는 번뇌 삼루(三漏)와 칠루(七漏) 여래는 법신 반야 해탈을 얻으셔서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샘이 없는 무루(無漏) 불성에 들어있지만, 중생들은 이런 불성을 가려서 미망(迷妄) 속에서 빠져있다. 중생들이 본래의 불성을 가리는 이러한 미망의 번뇌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여래는 삼루(三漏)를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