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수행자의 모습이 위태로움을 넘어 소리없이 무너지는 단계가 아닌지...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 고유의 특성과 곤경이 있기 마련이지만,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라는 시공간만큼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지닌 경우는 흔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눌이 살았던 고려 중기도 말법시대(末法時代)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었고 더 올라간 원효의 시대 또한 만만치 않은 혼돈
우리는 왜 공부하는 것일까? 아동기에는 아마도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본능적인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고, 거기에 부모의 자연스런 욕심에 기반한 다양한 공부기회들이 여행이나 이른 한글 공부, 캠프 등의 형태로 주어지면서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억지로 공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가 유치원이나 학교 교육과정에 근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먼 곳으로 다녀야했던 내게는 산길과 신작로의 추억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주로 산길로 다녔지만 비가 많이 와 길이 없어진 장마철이거나 많은 눈이 내려 쌓인 겨울철에는 비교적 안전하다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신작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 신작로를 터덕터덕 걷다가 운이 좋은 날에는 소나 말이 끄는 수레, 즉 구르마를 타는 호사를
선생님! 처음 뵈었던 1981년 봄, 관악캠퍼스는 두런거리는 공포와 학생들 보다 더 많은 전경들의 앳된 피로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핏빛 희생을 깔고 야차보다 더 무서운 눈빛으로 국민들 앞에 군림하던 군부 정권이 강의실까지도 서슴없이 드나들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교육학 개론’ 담당 교수로 대형 강의실에
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은 대체로 그 사회의 문화수준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다. 세계사 곳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평가받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나 조선 중기 유교공동체의 경우는 각각 그리스도교와 성리학이라는 강력한 도덕이자 이념의 장악과 지배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수준은 교회가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고 성리학자 집단들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무너지자
말 그대로 ‘잔인한 사월’이 가고 신록이 시나브로 짙어가는 오월을 맞고 있다. 아직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사고로 인한 온 국민들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있고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 참혹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이 시절에 우리는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고 있다. 어린이날과 이어져 있는 올해 석탄일은 예
유난한 추위가 있을 것이라는 예보를 보기 좋게 빗나가게 하고 대신 엄청난 양의 눈을 뿌린 겨울이 물러서고 여기저기서 봄의 소리들이 수런거리며 들려오고 있다. 연구동 장식하는 목련나무 꽃망울들이 그러하고, 눈을 뒤집어쓴 채 장엄한 부처상을 짓던 소나무가 푸르름의 색채를 바꾸며 환하게 고개 내미는 것도 그런 소리들로 들려오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다. 그런데 가
새로움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새로운 상품을 ‘신상’이라 부르며 맹목적으로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통용되기도 하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움은 그 의미를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그 새로움은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설렘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우리 주변에
지난 주말 처연한 소멸의 아름다움을 내뿜는 단풍과 가을 하늘의 온전한 쾌청함을 만끽하면서 탈핵 도보순례길에 동참했다. 변산반도 끝자락 줄포 성당에서 출발해서 판소리의 거장 김소희 생가가 있는 후포 갯벌을 지나 선운사에 이르는 일정이었다. 그 길에는 ‘화려한 삶’을 산 이 고장 사람 미당 서정주와 인촌 김성수의 자취가 있기도 했지만 눈길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파멸(破滅)의 문으로 들어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실존이라는 삶의 언저리에서 주인공으로 살면서 승리하기를 기대하고 또 기원한다. 이때 그 파멸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승리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잃는 일이 가장 심각한 파멸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
1.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한국불교(계)가 표류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사회가 외적인 성장이라는 외피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불교계는 종교로서의 청정성은 물론 최소한의 세속 윤리마저 지니지 못한 채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듯한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는 느낌을 줄
우리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무상함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말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을 위한 개념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자꾸만 그 개념들에 집착하여 서성거리게 된다.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현재의 고통을 견디기도 하고 이미 지나가버린 화려한
사람은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고 그것을 다시 글로 쓰는 일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갖가지 생각을 하면서 신문을 들여다보거나 건성으로 텔레비전을 켜놓고 밥을 먹은 후에 출근길을 서둘렀을 가능성이 높고, 직장에 나가서도 일과 사람들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