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15일 종교문화탐방의 일환으로 강원도 삼척시에 소재한 사찰 안정사(대불교조계종)에서 진행된 ‘목련존자 일대기 땅설법’을 참관하였다. 이날은 음력 7월 15일에 해당되어 세시풍속에서는 백중(百中), 백종(百種),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 우란분절(盂蘭盆節) 등으로 부른르며, 전통적으로 새로 익은 과일을 따서 조상의 사당에 천신(薦新)을 올리고 농가에서는 머슴에게 돈을 주며 하루를 쉬게 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갔던 승려들이 수행을 마치고 해제(解制)하는 날로서, 특히 석가모니의 제자인 대목건련(大目乾連, 일명 목건련, 목련, 또는 목련 존자가라고도 한다)이 자신의 어머니가 사후 전생의 죄업으로 아귀(餓鬼)가 되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석가모니의 조언에 따라 해제일에 맞추어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였다는 고사에 따라 조상의 선처환생(善處還生)을 바라며 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의식이 바로 우란분재(盂蘭盆齋)로서, 이러한 우란분재의 기원 고사를 이야기한 경전이 《우란분경(盂蘭盆經)》이며, 우란분절이라는 절기명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안정사에서는 오전에 ‘정결의례(淨潔儀禮)-시련(侍輦)-대령(對靈)-관욕(灌浴)-신중작법(神衆作法)-불공(佛供)’의 일반적인 불교 재례(齋禮) 양식을 따르는 우란분재가 간단히 설행되고, 땅설법은 오후에 진행되었다.
나비가 꽃향기에 취해 주변을 날아다닌다. 정말 신이 난 듯 화분(花粉) 먹기에 심취하여 살금살금 다가가도 모른다.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는 듯 참으로 편안하다. 그러다가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순식간에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것도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갈지(之)’ 자로 난다.
행복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평범한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많은 준비물도 필요하지가 않았습니다. 라면에 믹스커피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정말 소박한 준비물이었는데 그런데도 난 평생 기억될 행복을 느꼈습니다.
석두는 남종선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강서(江西)에 마조가 있었다면 호남(湖南)은 석두였다.
가지는 더운 아시아 지방이 원산지인 다육질 열매채소지만, 요즘은 비닐하우스 덕분에 계절에 관계없이 겨울철에도 즐길 수 있는 여름 채소다. 어릴 적에 아이들 키만큼 큰 가지의 줄기에 보랏빛 가지가 매달려 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걸 보노라면, 신기하기도 하고 따 먹고 싶은 유혹에도 시달렸다. 몰래 따서 한 입 푹 깨물면 아릿한 맛이 제법 입맛을 돋우었다. 이렇게
여기 남들이 보면 절망적인 삶이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있다. 하나는 가벼운 톤으로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처절하게 그렸다.
땅설법이란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하는 법문’을 뜻한다. 삼척 안정사(安政寺)의 다여(茶如) 스님과 신도들이 바로 땅설법을 전승해온 불교공동체의 주인공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불 벽에 그린 아미타여래삼존도의 관음보살입니다. 비단이나 삼베에 그린 탱화가 아니라, 마감한 흙벽에 대단히 섬세하게 그린 벽화입니다.
암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하고,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고, 또는 사망하는 일을 주변에서 종종 접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종합검진을 통해서 암이 있는지 없는지 늘 확인하며 살고 있다.우리 곁에 한층 다가온 암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공포는 무엇일까?암은 세포 일부가 이상 분열하는 현상이다. 몸에서는 정상세포로 인지되지만 실제는
일본의 경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며 지난달에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을 수출 규제하더니, 이달엔 전략물자 수출 간소화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100여 년 전에는 군사력을 앞세웠다면, 지금은 경제력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이 다를 뿐이다.우리가 지금 번영을 누리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건 일제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각자와 항일운동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경제 침탈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선각자와 항일운동가의 정신을 계승해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자 광복이다.
아산 보문선원은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과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의원을 역임한 석주당 정일(昔珠堂 正一) 스님이 일군 도량이다.이 절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각 전각마다 걸린 한글 편액과 주련이다. 각 전각에는 ‘큰법당’, ‘관음전’, ‘지장전’이라는 한글 편액이 한글 주련과 함께 걸려 있다. 모두 석주 스님이 직접 썼다.석주 스님은 운허 스님과 함께 1961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해 역경불사에 힘썼다. 1989년부터는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소임을 맡아 역경사업 활성화에 진력했다.한글 편액을 처음으로 전각에
원종(圓宗)은 1910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단이다. 원종은 친일 성향이 강했던 불교연구회를 대체해 설립됐지만 대중의 기대와 달리 창립 초기부터 친일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해 10월 종정 이회광이 일본에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 7개조’를 체결하고,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 책동했다. 이에 대항해 조선불
▲ 북한산성 승영사찰 중 하나였던 서암사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폐사됐다. 복원 불사가 진행 중이다. ▲ 북한산성계곡길. ▲ 북한산성계곡길 ▲ 승병 지휘자인 총섭(摠攝)을 임명할 때 지켜야 할 규칙 3가지를 새긴 ‘북한산승도절목(北漢山僧徒節目)’. ▲ 산영루. 실학자 성호 이익이 ‘산영루에 뜬 달’을 삼각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입니다. 최고봉인 백운대의 높이가 836m 남짓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 또한 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북한산은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五嶽) 중 한 곳으로 꼽혔습니다.북한산은 봉우리가 험준하고 가파른 탓에 삼국시대 이래 천혜의 요새로 주목받았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했고, 고려는 거란이 침입하자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산성을 축조했습니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뒤 도성을 지키고 임금이 피난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북한산성을 쌓았습니다. 북한산성을 쌓는 일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의 군사와 한양 주민이 동원되었지만, 전국에서 뽑혀 올라온 승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독립은 자존심 있는 민족에게 당연한 일인 것이지 일제의 총독정치의 탄압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독립운동은 절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 행동인 것이다.만해 스님은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스님은 차디찬 옥중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여 전개하였다. 그러나 스님에게 3년에 걸친 수감생활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했던 동지 하나둘 변절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번민과 회한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관된 신념을 한시로 표현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고, 누구보다 투철한 독립정신을 지키면서 감옥에서 를 집필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항일운동이었다.
675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항상 일으켜 밤낮없이 부지런히 수행한다면, 번뇌는 다하고 마음은 밝아져 마침내 원만한 열반의 경지(寂靜)에 이를 것이니라. -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넓게 공부해야 한다〔博學〕676성현께서는 세간의 모든 일을 다 알아 온갖 활동에 거리낄 미혹이 없느니라. - 《출요경(出曜經)》677많이 듣고 넓게 배워 부처님의 가르침〔法藏〕을
출가한 수행자에게는 두 종류의 단단한 올가미가 있다. 첫째는 사견(邪見)의 올가미요, 둘째는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올가미이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법에 대한 두 종류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세속인과 과하게 어울리는 일이요, 둘째는 스승과 도반(師友)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일이다. 출가한 수행자에게 두 종류의 악행이 있다. 첫째는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것이요, 둘째는 계를 어기면서도 신자의 보시를 취하는 것이다. 출가한 수행자에게는 두 종류의 종기가 있다. 첫째는 남의 단점에 집중하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에게 두 종류의 병이 있다. 첫째는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음이요, 둘째는 대승을 배우는 이를 헐뜯는 것이다. - 《마하연보엄경(摩訶衍寶嚴經)》
최근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표면적 이유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戰犯企業)에 배상을 청구한 데 대해 우리나라 대법원이 2018년 10월 ‘개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판결의 핵심은 일제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불법 강점할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우리 국민 약 20만 명에게 해당 기업이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것이다.현재 일본 아베 내각은 1965년에 한일 양국 정부가 맺은 한일기본조약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다. 아베 이전의 일본 정부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오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작년 연말 전후로 스스로 뒤집은 것이어서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이나 정부를 탓할 일이 아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해 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민족대표 뿐만 아니라 일제하 독립 운동가가 대거 수용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형무소였다. 이번 장에서는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만해 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거나 처형당한 수난과 아픔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서대문형무소는 경성감옥에서 유래되었다. 1907년 12월 27일 법부령 제1호로 한성부에 감옥서(監獄署)를 설치하고 경성감옥서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10월 21일 법부고시(法部告示) 제8호로, 경성감옥을 10월 19일 독립문 밖 신축 감옥으로 이전하였음을 고시하였다. 이로써 서대문형무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경성감옥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저항했던 의병세력과 계몽운동세력을 일반 대중과 격리·감금하여 민족적 저항의지를 꺾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 이 감옥은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 병신이 돼서 나오는 곳’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다.1912년 9월 3일 경성부 공덕리(孔德里, 현재의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설치하고 종래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로 개칭하였다. 1923년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권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불복장의식과 내용물들은 단순한 종교적인 의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상이 조성된 사회적 배경이나 사상적인 배경까지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특히 불상 제작과 관련된 조성문, 발원문, 시주된 경전과 의류에는 당시 불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과 불상을 조성한 조각 승(僧)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