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이 나뭇잎에 내려앉는다. 노랗게 연붉게 이곳저곳 퍼져간다. 멀리 북한산자락을 거쳐 백련산을 지나 어느덧 성미산까지 가을이 깊어졌다. 아침공기가 사뭇 차가워졌고 입김까지 난다. 분주한 아침시간이 지나고 잠시 여유로움이 찾아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 겸 탐조를 나간다.10월의 느지막한 날이 되면 반가운 새가 가을 향기를 타고 찾아오는데 오늘은 꼭 만날 것
점심 무렵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에 도착했습니다. 롯지가 양지바른 곳에 있어 점심을 기다리며 약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풍경도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말쑥한 마차푸차레 봉우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습니다.우리가 주문한 감자와 라면이 나왔는데 맛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점심은 맛있게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라면도 맛이
겨울이 시작되자 감기에 걸린 이들이 적지 않다. 모든 병의 시작이자 가장 흔한 감기에 대해 알아보자.감기의 원인은 주로 호흡기를 통한 바이러스 감염이며, 기침, 콧물, 가래 등의 호흡기 증상과 발열, 오한, 근육통 등의 전신 증상을 보인다. 보통은 감기약을 며칠 먹고 땀을 빼고 푹 쉬면 낫는다. 그러나 잘 낫지 않으면 폐렴이나 기타 전신성 질환으로 바뀔 수
두 해 전만해도 한국사회에서는 ‘소셜 포비아’, ‘햄버거 포비아’, ‘계란 포비아’, ‘기부 포비아’ 등 ‘포비아(phobia)’ 라는 단어가 익숙할 만큼 자주 등장했다. ‘포비아’는 어떠한 상황 또는 대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오래 전, 어느 기자가 성철선사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영상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스님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끼친 서책은 무엇인가요?”“제일 내가 영향을 크게 받은 조사스님들 보면, 《조주록》하고 《운문록》이야.”문장의 주술 호응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성철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선사가 조주와 운문이었음은 알 수
내 나이 다섯 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수제비 이야기를 하려니, 끼니를 굶지 않으려고 풀떼기처럼 끓여 연명하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향 함경도에는 밀가루가 귀했던 것 같다. 어릴 적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가 수제비라고 해주신 것은 노란 좁쌀을 절구에 찧어 채로 곱게 걸러내 손가락처럼 빚어서 끓인 것으로
내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선배네 집에 갔을 때 벽에 붙은 〈보왕삼매론〉을 봤을 때다.“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로 시작하는 보왕삼매론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끌었다.이제 갓 대학
500년 이상 단절의 아픔을 딛고 사경문화가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더군다나 여러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신앙인들이 각각의 종교에 따른 성전을 필사하는 형태로도 진행되고 있다.특히 불경의 사경은 붐이 일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과거 한문사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글사경과 범자다라니사경 등으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고, 다양한 장정과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문화예술의 한 장르로도 자리매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조급증 등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도 나아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의 복장사경과 불탑의 납탑용 사경 위주로 행해지고 있음은 깊은 성찰을 요한다. 1,7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분야라면 그동안 선조들이 쌓아올린 전통에 대한 학습과 이해를 병행하려는 노력이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사리에 대한 예경이자 사경의 첫걸음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한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 이 세상에 오시기로 수기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시대를 만나기가 참으로 가없습니다.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은 크기가 12m에 이릅니다. 1934년 실화로 손상된 불상을 1938년 당대의 진보조각가인 김복진 선생이 복원하였지요. 왼손에 쥔 금빛 보주가 국토에 놓을 진리의 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
한 해의 결과가 좋다면 더욱 분발하는 계기를 삼으면 되고, 좋지 않다면 그 속에서 실패의 원인을 밝혀 성공의 열쇠를 찾아내면 될 일이다. 성공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아름다운 선물이다.《경율이상》에 “곡식을 얻으려면 마땅히 갈고 씨를 뿌려야 하며, 큰 부자가 되려면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하며, 오래 살려고 하면 마땅히 큰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지혜를 얻으려면 마땅히 학문을 닦아야 하니,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그가 심는 바에 따라 그의 열매를 얻는다.”고 했다.12월은 한 해의 마무리하는 달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달이다. 물러섬이 없는 정진을 기대한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기단부 중대석에 새겨진 용과 구름입니다. 용은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입니다. 소용돌이치는 구름 사이로 화염보주를 감싸고 도는 용의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했습니다. 용의 얼굴과 비늘, 움켜쥔 발톱이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습니다. 보물 제36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익산 심곡사는 통일신라 말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창건 이후 역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대웅전은 순조 19년(1819) 중창한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불전이다. 여기에 걸린 편액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현 선학원) 제4대 이사장을 역임한 경봉 정석(鏡峰 靖錫, 1892~1982) 스님의 글씨이다.1907년 양산 통도사 성해 스님에게 출가한 스님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한 푼어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전국의 선원을 찾아다니며 참선수행에 힘썼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영시암을 떠날 때부터 소슬하게 계곡을 헤집던 바람은 오세암을 지나 봉정암으로 향하자 비를 몰고 와 ‘어서 돌아가라’는 듯 등을 때렸습니다. 겨우 몸을 가려주던 비옷은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고, 젖은 신발은 더는 가지 말라는 듯 발을 부여잡았습니다. 가야할 길은 된비알인데, 설상가상으로 두 허벅지에서는 경련이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습니다. 불현듯 목적지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통의 끝에 다다르면 의지할 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절로 ‘관세음보살’의 명호가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정근을 하며 힘을 내 다시 산길을 올랐습니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요? 힘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쉬었다 옮기길 수백 번, 날이 저물고서야 봉정암에 도착했습니다. 오느라 고생했다는 듯 눈앞에 불빛이 반깁니다.누구나 평탄한 삶을 바라지만 때론 힘든 길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뜻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이도 있지만,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찾아 지난한 출가수행자의 길을 택한 이나,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고자 삶을 투쟁의 험지에 던진 이들이 그런 이들입니다. 설악산 깊은 곳에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 만해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또 독립운동가로서 고난으로 점철된 길을 ‘고독하게’ 걸어갔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된비알을 고통스럽게 오르며 만해 스님의 삶이 위대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불상 앞에 연꽃이 곱게 올라온 연밭이 펼쳐졌다. 감로탱을 재현한 모습이다.지난 11월 6일까지 불일미술관에는 종이로 만든 꽃[지화(紙花)]이 부처님을 공양하는 전시가 열렸다. 향기만 없다 뿐이지 실제 꽃에 비견할만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종이가 어쩜 이렇게 예쁜 꽃이 될 수 있어요?”관람객들은 저마다 눈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 문경읍 사무소 갈평출장소 앞에 있다. 원래 2km쯤 떨어진 관음사 터에 있던 석탑인데, 일제 강점기 외지로 반출됐다가 주민이 되찾아와 현재 자리에 복원했다. ▲ 문경 갈평리 석조약사여래좌상. 관음리 석조반가사유상과 관음리 석불입상, 갈평리 석조약사여래좌상 등 여러 성보와 절터는 계립령을 넘나드는 길손
‘강진 백련사 사적비’ 옆면에 새긴 당초무늬〔唐草文〕입니다. ‘당초’는 특정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풍(唐風), 즉 이국풍의 덩굴을 의미합니다. 당초무늬는 불교미술의 장식무늬로 널리 쓰였습니다. ‘강진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양식을 함께 볼 수 있는 드문 비석입니다. 탑비와 이수가 없어진 고려시대 원묘국사탑비의 귀부를 숙종 7년(1681) 사적비를 세우면서 재활용했습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는 덕주사 마애불은 상덕주사에 있습니다.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인 선각에 가까운 조각기법으로 조성한 거대 마애불입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고 하지만 지방 호족세력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재력이 있어야 하고, 나라를 잃고 떠도는 덕주 공주가 조성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입니다.하지만 월악산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마냥 전설로 치부하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어쩌면 이곳은 신라의 유민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륵대원에 미륵불을 조성하고,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상덕주사에 올라 마애여래입상을 등지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악산 줄기를 바라봅니다. 마주한 덕주봉 너머에는 마의 태자가 머물렀다는 미륵대원의 옛터가 있습니다. 하늘재를 넘어 미륵대원지와 사자빈신사지를 거쳐 상덕주사까지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천 년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마의 태자와 동생의 꿈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며 평생 이곳에서 정진한 덕주 공주의 자취를 들춰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옵니다.
영천 은해사와 산내 암자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여럿 있다. 헌종 13년(1847)에 일어난 큰불로 극락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타 다시 지을 때 추사와 인연이 있던 혼허 지조(混虛智照) 스님이 부탁해 여러 점의 글씨를 받았다.‘ 은해사(銀海寺)’,‘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일로향각(一爐香閣)’, ‘불광(佛光)’, ‘산해숭심(山海嵩深)’, ‘시홀방장(十笏方丈)’등 편액이 그때 추사에게 받은 글씨이다.은해사 백흥암 보화루에 걸려 있던‘산해숭심’은 청나라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욕망을 제어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현대사회는 물신주의(物神主義)가 팽배해지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졌다. 불확실성을 담보로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푼돈으로 복권을 사고 십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힘겹고 고
태풍 링링이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창문 틈 사이에 종이를 끼워 유격을 없앴고 옥상과 베란다에 있는 화분은 실내로 들여 놓았다. 그리고 집 주변을 살피며 서당을 거쳐 산으로 갔다. 박새, 곤줄박이, 청딱따구리, 솔부엉이, 새호리기, 까치 등 새들의 둥지와 옹달샘, 빗물저금통 그리고 새 먹이통을 점검하였다.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