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10일 바람조차 한 점 흔들림 없이 고요하던 그 날! 중앙고보 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황정환, 이동환은 이미 불같이 뜨거워진 손을 꼭 맞잡고 길을 나섰다. 일제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 식민지 차 별 교육에 대한 반발은 더 이상 그들을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밤새 피로 써 내려간 격문과,
내가 사는 집 앞쪽에 텃밭이 있다. 100평쯤 될까? 그 절반에는 매실, 사과, 복숭아 등의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어 채소나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밭은 50평 남짓하다.텃밭이 있어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은 깨끗하고 싱싱한 채소와 이런 저런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텃밭이 주는 가장 큰 이로움은 수행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나의 스승, 백봉 김기추거사는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의 시 〈풀〉은 오랫동안 권력의 억압에 맞선 민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런 해석의 독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제 풀은 생태적 존재나 숙명의 극복원리, 더 나아가 여성의 성욕과 절정의 희열로 읽기에 이르렀
간밤에 내린 눈 녹지 않고 소복이 쌓이듯덕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사람은저절로 복이 쌓인다.
부처님에게는 어려서부터 아주 절친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왕궁에서 싯다르타 태자로 자라날 때에도 옆에서 늘 함께 지낸 사람입니다. 심지어 싯다르타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던 날,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한 사람이고, 궁으로 돌아와 정반왕에게 태자의 출가를 보고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두 사람 인연이 어마어마하다
불화(佛畵)라고 하면 불교 회화의 준말이며 쉽게 말해 불교 그림, 즉 불교의 사상과 교리에 기초하여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그려진 성스러운 종교화를 뜻한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이나 티베트 등을 통해 전해진 경전은 하나같이 한자나 범어로 쓰였으므로 극소수를 빼고는 거의 모든 백성이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경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
급격하게 날씨가 추워졌습니다.최근 치매의 원인이 밝혀져 근본적인 치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습니다. 치매는 정부 보건사업에서도 중점 관리대상 질환입니다.예전에는 가족 문제로 치부하며 배우자나 자식들이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으나. 요즘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같은 보건기관이 나서는 추세입니다. 현재 치매판정을 받은 인구가 7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니 점차 가족과 사회가 분담하게 될 것입니다
성주산(聖住山)은 오서산과 함께 보령시를 상징하는 명산으로, 시 동쪽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산이 ‘성인이 머무는 산’이란 뜻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 국사 무염(朗慧 國師 無染, 801~888) 스님과 통일신라 말 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같은 성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성주산과 옥마산 사이를 관통하는 성주터널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왼쪽 계곡길로 1km 쯤 거슬러 오르면 탑과 석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제법 드넓은 평지가 나옵니다. 무염 스님이 머물던 성주사(聖住寺)의 옛터지요.겨울을 재촉하는 듯 갑자기 찾아온 한기와 솜털 같은 눈송이를 곧 뿌릴 것 같은 하늘이 옛 절터를 스산하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유명한 절터이지만, 이곳에 처음 자리한 사찰이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백제 법왕이 즉위 첫해(599)에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다는 기록〔〕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오합사는 지금으로 치면 사찰을 겸한 국립 현충시설이었겠지요.삼국은 치열하게 정복전쟁을 벌였습니다. 법왕이 군사적 요충지였던 보령에 오합사를 지은 것은, 전쟁으로 지친 민중을 위로하고 호국영령을 천도해 국론을 모으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주남 화백은 충남 보령을 대표하는 작가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오랜 시간 보령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보령에서 그를 만난 날은 그가 수덕사에서 전시를 마치는 금요일이었다. 다음날부터는 갤러리 탑에서 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전시작품을 옮겨놓아야 했다. 봄에 하기로 한 수덕사 전시가 코로나19로 미뤄졌고, 다음 전시는 이
우리나라 절에서는 오신채(파, 마늘, 달래, 흥거, 부추)를 먹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스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방불교의 본산인 미얀마 마하시선원에서 가장 놀라운 풍경은 수행자의 밥상에 올라온 고기였습니다.탁발문화가 아직 남아있는 등 계율이 더욱 엄격
날씨가 차가워지는 가을을 거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드는 겨울을 앞두고 있습니다.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 환절기에 감기로 고생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코, 목구멍, 기관지, 폐와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차가운 공기는 피부를 잡아당겨 긴장을 발생시키고, 모공을 좁게 만들며, 혈관을 수축시킵니다. 추위에 대응
먼저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 가운데 가슴 중심부터 살펴보자. 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이끌고 있는 힘의 중심을 말한다. 즉 에너지 센터라 할 수 있다. 가슴 중심은 사랑, 인정, 관계를 갈구하는 무의식적 패턴을 형성하게 되고, 감정 기능에 치우친 눈으로 세상을 본다. 2번, 3번, 4번 성격유형이 여기에 속한다.“내게 오세요, 나는 당신을
내 집 동쪽 편에 큰 산이 있다. 서운산이다. 높이는 547.6m에 불과하지만 들판에 우뚝 솟아있어 아주 우람하다. 백두대간에서 나누어진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속한 산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속리산에서 한 줄기 지맥이 서북쪽으로 뻗어있다. 그 산맥은 칠장사가 있는 칠장산에서 다시 나누어진다. 북으로 가는 한남정맥(漢南正脈)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렸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더듬어 찾아내었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진작 굳게 다짐하였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건물 앞에서 망을 보았다. 아무래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유학생들은 미숙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길을 잃어 일본 경찰의 눈에 띄면 곤란하다. 다 쓰러져가는
몇 해 전, ‘김구의 〈나의 소원〉은 춘원 이광수가 대필한 것’이란 주장이 역사학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독립운동의 대부가 자신의 핵심철학을 피력한 명문이 실은 일제 부역 경력이 있던 이광수의 〈나의 나라>와 내용이나 흐름이 유사하고, 문화강국에 대한 강조는 일본 메이지유신 당시 유행한 ‘아름다운 나라’란 개
어느 날 파타차라 스님은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와 발을 씻었습니다. 물을 발에 붓자 물은 발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땅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발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조금 더 멀리 흘러나가다 이내 땅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스님은 대야에 남은 물을 마저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이 조금 더 멀리까지 흘
모든 종교 의례는 살아 있는 사람이 행하는 의식이다. 불교 의례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불교 의례는 여러 형식 중에서도 죽음과 관련되는 의식이 대표적인데, 죽음 관련 의식이 성립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는 윤회사상이다. 중생이 천상-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을 윤회한다고 하는 육도윤회설의 불교 교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새로운 탄생에 관심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내가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생사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역경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닥친 삶의 문제는 결국 과거 자신이 지은 과보로 말미암아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윤필암에서 네 부처님을 친견하러 발길을 옮깁니다. 오솔길을 따라 400m쯤 가면 대승사로 넘어가는 갈래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산 정상을 향해 다시 400m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면 사면석불에 다다릅니다.지난한 세월 중생의 아픔을 품었기 때문일까요?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중생계를 굽어본 네 부처님은 풍화작용과 마멸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네 부처님을 참배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윤필암과 묘적암이 손에 잡힐 듯 앉아있고, 공덕산과 산북면 일대가 한 눈에 시원하게 들어옵니다.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니 운달산과 사불산 자락의 도량은 민족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견디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쇠락한 불교를 중흥시키려 수행과 교육에 힘쓴 선지식들의 꿈이 영글어 가던 곳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김룡사 보장문 편액이 가리키는 보물은 선지식들의 원력과 구도열이 아니었을까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담아 순례자에게 전해 주는 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