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春雪〕이 내렸습니다. 순례지를 향해 가는 길가 기슭엔, 헐벗은 가지 사이로 밤새 내려앉은 봄눈이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 흐느적이며 순례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칠흑 같은 어둠이 아침햇살을 이기지 못하듯, 대지를 호령하던 삭풍은 따뜻한 봄기운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아침햇살이 깊은 어둠을 헤집고 새날이 밝았음을 선언하듯, 복수초는 차가운 눈 속에서 노란 꽃망울을 피우며 봄이 왔음을 알릴 터입니다. 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세상을 비관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 작은 몸부림도 언젠가는 어두운 대지를 밝히
불연(佛緣)의 땅 영동산세가 험한 영동지방은 오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영동, 서울-양양 두 개의 고속도로와 미시령터널, 고속철도 등이 개설돼 쉽고 편리하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옛날에는 대관령이나 구룡령, 미시령, 한계령, 진부령 같은 험하디 험한 큰 고개를 넘어야 할 만큼 오지였습니다. 오죽하면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왔다는 이야기가 전할까요?교통의 오지였던 만큼 영동지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첫 선 전래자 법랑과 신행문헌상 우리나라에 선(禪)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7세기 중엽입니다. 법랑(法郞, ?~?) 스님이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 스님에게 법을 배우고 귀국한 것이 그 시초이지요. 그러나 법랑 스님의 행적은 제자인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 스님에게 법을 전한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신행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자 당으로 유학을 떠나 지공(志空) 스님으로부터 법맥을 잇습니다.중국 선종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에 이르러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나뉩니다.
성주산(聖住山)은 오서산과 함께 보령시를 상징하는 명산으로, 시 동쪽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산이 ‘성인이 머무는 산’이란 뜻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 국사 무염(朗慧 國師 無染, 801~888) 스님과 통일신라 말 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같은 성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성주산과 옥마산 사이를 관통하는 성주터널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왼쪽 계곡길로 1km 쯤 거슬러 오르면 탑과 석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제법 드넓은 평지가 나옵니다. 무염 스님이 머물던 성주사(聖住寺)의 옛터지요.겨울을 재촉하는 듯 갑자기 찾아온 한기와 솜털 같은 눈송이를 곧 뿌릴 것 같은 하늘이 옛 절터를 스산하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유명한 절터이지만, 이곳에 처음 자리한 사찰이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백제 법왕이 즉위 첫해(599)에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다는 기록〔〕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오합사는 지금으로 치면 사찰을 겸한 국립 현충시설이었겠지요.삼국은 치열하게 정복전쟁을 벌였습니다. 법왕이 군사적 요충지였던 보령에 오합사를 지은 것은, 전쟁으로 지친 민중을 위로하고 호국영령을 천도해 국론을 모으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윤필암에서 네 부처님을 친견하러 발길을 옮깁니다. 오솔길을 따라 400m쯤 가면 대승사로 넘어가는 갈래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산 정상을 향해 다시 400m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면 사면석불에 다다릅니다.지난한 세월 중생의 아픔을 품었기 때문일까요?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중생계를 굽어본 네 부처님은 풍화작용과 마멸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네 부처님을 참배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윤필암과 묘적암이 손에 잡힐 듯 앉아있고, 공덕산과 산북면 일대가 한 눈에 시원하게 들어옵니다.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니 운달산과 사불산 자락의 도량은 민족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견디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쇠락한 불교를 중흥시키려 수행과 교육에 힘쓴 선지식들의 꿈이 영글어 가던 곳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김룡사 보장문 편액이 가리키는 보물은 선지식들의 원력과 구도열이 아니었을까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담아 순례자에게 전해 주는 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내포는 서산과 예산의 경계를 이루는 가야산(伽耶山)이 품은 열 고을을 이르는 말입니다. 서산, 해미, 태안, 면천, 당진, 홍주, 덕산, 예산, 신창 등이 그곳이지요. 이중환은 “이곳(내포)의 땅은 기름지고 평평하면서 넓다. 또한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서 대를 이어서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평했습니다. 그만큼 문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겠지요.가야산은 내포의 중심이자, 내포를 상징하는 산입니다. 가야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지내던 중사(中祀)의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중사는 국토의 네 방위에 있던 명산에 지내던 제사인데, 서쪽 명산이 가야갑악(伽耶岬岳), 즉 가야산입니다.‘가야’라는 이름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부다가야(Buddhagaya) 인근 가야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가야산’은 ‘상왕산(象王山)’으로도 불립니다. 원래 가야산과 상왕산은 서로 맞닿은 다른 산이지만, 예로부터 두 산을 아울러 가야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가야’라는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했듯, ‘상왕’이라는 이름도 불교에서 기원했습니다.
강화역사박물관 안에는 400년을 살아온 탱자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높이 4m, 밑 둘레 1m가량 되는 이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보호수입니다. 강화지역은 탱자나무가 야생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탱자나무에는 외적의 침략을 막으려는 우리 선조의 바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강화성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외곽에 울타리 삼아 심은 탱자나무 중 한 그루지요.탱자나무가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은 갑곶돈대 경내에 있습니다. 돈대는 주변 관측이 쉽도록 높고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시설입니다. 강화도 해안가에는 5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의 군사시설이 있었는데, 효종의 북벌 계획과 숙종의 국방력 강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고려와 조선이 강화도를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화해협, 즉 강화도와 김포 사이 바다는 물 흐르는 속도가 빠르고 갯벌이 드넓어 적이 쉽게 상륙할 수 없습니다. 강화해협을 염하(鹽河)라고도 부르는데, 거센 바다 물살이 마치 흐르는 강과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을 쉽게 통제할 수 있고, 해로로 호남·호서지방의 풍부한 물자를 수월하게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외침에 맞서 장기전을 펼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요.
전북 전주시와 김제시를 허리에 끼고 김제·만경의 너른 들(김만평야)을 굽어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은 높이가 793.5미터에 불과한 그리 크지 않은 산입니다. 여느 명산처럼 웅장한 모습이나 기암괴석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이 산은 고된 삶 속에서도 평화롭고 평등한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살아간 이 땅의 민초들을 품은 넉넉한 산입니다.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때로는 남의 불행을 발판 삼아 딛고 올라서야 하고, 때로는 내가 상대의 재물이 되어야 합니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가늠하기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방을 분간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욕망의 그물에 사로잡힌 삶은 늘 고통과 두려움의 연속이기 마련입니다.두려움과 고통이 없는 평화롭고 평등한 미륵의 세상은 어쩌면 어머니 품안에 안긴 어린 아이가 마주하는 세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산〔母岳〕’이라는 이름에는 모든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식을 지켜내는 어머니의 깊고 너른 품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 받고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품이 되어주길 바라는 민초들의 바람이 담긴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기를 안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은 큰 바위가 산꼭대기에 있어 ‘엄뫼(어머니산)’라 불렸다는 이야기를 마냥 흘려들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고, 수많은 풀과 나무가 모여 큰 숲을 이루듯, 1600여 년 동안 이어온 한국불교는 이 땅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일구어낸 장대한 역사입니다. 하지만 은하수를 이루는 수많은 별 중에도 밤하늘을 빛내는 별이 있고, 대지를 품에 안은 숲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천년수가 있듯이 한국불교사의 장대한 강물에도 물길을 트고, 도도한 흐름을 일구어낸 선지식이 있습니다.한국불교사를 일구어낸 수많은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아마도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첫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은 ‘진나 보살의 후예’, ‘화쟁 국사’로 불릴 정도로 교학에 큰 업적을 남겼고,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 부처님의 명호를 알게 되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를”(《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조) 정도로 대중교화에도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경주와 그 인근에는 원효 스님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는 사찰과 유적이 여럿 있습니다.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자 아들인 설총(薛聰, 655~?)이 부친의 유골로 소상(塑像)을 조성해 모셨던 분황사(芬皇寺)를 비롯해 왕과 여러 대신에게 《금강삼매경》을 강설한 황룡사지(皇龍寺址),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은 월정교지(月淨橋址, 月精橋址),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가 서 있었던 고선사지(高仙寺址), 스님이 중창했다는 기림사(祇林寺), 도반이자 스승인 혜공 스님과의 일화가 남아있는 오어사(吾魚寺) 등이 그곳입니다.
흔히 백제의 수도로 한성과 공주, 부여를 꼽지만 최근에는 익산도 그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백제 제30대 무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하였고, 이곳으로 천도(遷都)하려 했다거나 천도했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익산 천도설’이 그것입니다. 익산시에는 금마면을 중심으로 백제 유적이 여럿 곳 남아있습니다. 미륵사지, 사자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익산 토성, 미륵산성 등인데, 모두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합니다.익산의 무왕길은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더듬을 수 있는 둘레길입니다. 무왕길은 모두 3갈래인데, 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을 출발해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등을 들러 되돌아오거나, 왕궁리 유적에서 출발해 쌍릉에서 마무리하는 길입니다.미륵사지는 건마국(乾馬國)의 도읍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금마면 용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마국은 마한의 54개 소국 중 하나입니다.
손화중이 꺼낸 비결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손화중 무리가 비결을 탈취한 사건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 당시 민중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용문굴과 낙조대를 거쳐 천마봉에 올랐습니다. 이곳에 서면 도솔암과 멀리 선운사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천마봉 바위에 앉아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봤습니다. 진흥왕이 꾼 꿈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그리던 세상은 미륵이 출현해 일군 용화정토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염없이 미륵이 출현하길 기다리기엔 민중의 삶은 너무 힘들고 고됩니다. 온갖 차별과 다툼, 부의 편중이 없는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미륵의 세상을 현실세계에 일구어 내는 것이 민중의 바람이었겠지요. 그런 민중의 바람은 도적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알려준 검단 스님의 일화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마애불 복장에 감춰둔 비결을 꺼낸 동학교도의 행동으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선운사와 도솔암은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희망을 가슴에 품었던, 이 나라 민중의 삶과 한, 꿈이 깃든 현장이었습니다.
법천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남한강변의 또 다른 대찰이었던 거돈사지가 있습니다. 직선거리로는 3km, 산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충분히 다다를 5km 남짓한 거리입니다.법천사지에서 거돈사지를 잇는 산길은 ‘천년사지길’로 불립니다. 원주시가 도보길로 조성한 원주굽이길의 제10구간입니다. 천년사지길은 거돈사지를 지나 단강리까지 이어집니다.거돈사지는 황학산과 현계산 사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년사지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절터에 다다르면 큰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끄트머리에 서서 천 년 풍상을 겪은 느티나무가 순례자를 맞이합니다.법천사를 지킨 느티나무처럼 이 느티나무도 거돈사의 성쇠(盛衰)를 지켜봤을 테지요. 너른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불상을 모셨던 석조대좌, 원공국사탑비, 금당터와 강당터, 승방터 등이 제자리를 지키며 이곳이 한 때 풍경소리 가득했을 사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부악(父岳)입니다. 신라 때는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과 함께 오악(五岳)의 하나로 삼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산입니다. 나라에서는 봄과 가을에 오악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대구도호부’ 편에는 “중악(中岳, 중국 숭산의 다른 이름)에 비겨 중사(中祠)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옛 사람이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긴 팔공산은 국난 극복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기슭에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나라를 지킨 대중의 얼이 깃들어 있습니다. 동화사에서 부인사로 이어지는 팔공로는 그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입니다.‘팔공’이라는 산 이름에는 고려와 후백제 간 전쟁의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동화사 인근에서 벌어진 동수대전(桐藪大戰)은 통일전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태조 왕건이 생애 가장 크게 패한 전투입니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영시암을 떠날 때부터 소슬하게 계곡을 헤집던 바람은 오세암을 지나 봉정암으로 향하자 비를 몰고 와 ‘어서 돌아가라’는 듯 등을 때렸습니다. 겨우 몸을 가려주던 비옷은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고, 젖은 신발은 더는 가지 말라는 듯 발을 부여잡았습니다. 가야할 길은 된비알인데, 설상가상으로 두 허벅지에서는 경련이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습니다. 불현듯 목적지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통의 끝에 다다르면 의지할 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절로 ‘관세음보살’의 명호가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정근을 하며 힘을 내 다시 산길을 올랐습니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요? 힘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쉬었다 옮기길 수백 번, 날이 저물고서야 봉정암에 도착했습니다. 오느라 고생했다는 듯 눈앞에 불빛이 반깁니다.누구나 평탄한 삶을 바라지만 때론 힘든 길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뜻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이도 있지만,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찾아 지난한 출가수행자의 길을 택한 이나,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고자 삶을 투쟁의 험지에 던진 이들이 그런 이들입니다. 설악산 깊은 곳에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 만해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또 독립운동가로서 고난으로 점철된 길을 ‘고독하게’ 걸어갔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된비알을 고통스럽게 오르며 만해 스님의 삶이 위대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는 덕주사 마애불은 상덕주사에 있습니다.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인 선각에 가까운 조각기법으로 조성한 거대 마애불입니다. 덕주 공주가 조성했다고 하지만 지방 호족세력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재력이 있어야 하고, 나라를 잃고 떠도는 덕주 공주가 조성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입니다.하지만 월악산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마냥 전설로 치부하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어쩌면 이곳은 신라의 유민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륵대원에 미륵불을 조성하고,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상덕주사에 올라 마애여래입상을 등지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악산 줄기를 바라봅니다. 마주한 덕주봉 너머에는 마의 태자가 머물렀다는 미륵대원의 옛터가 있습니다. 하늘재를 넘어 미륵대원지와 사자빈신사지를 거쳐 상덕주사까지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천 년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마의 태자와 동생의 꿈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며 평생 이곳에서 정진한 덕주 공주의 자취를 들춰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옵니다.
늘 순탄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인간의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때로는 험한 산을 오를 때처럼 힘에 부칠 때도 있고, 때로는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갈 때처럼 위험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범부는 그런 굴곡진 삶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할 길이라면 험한 산길과 천 길 낭떠러지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위해 평온한 삶을 잊고 자신을 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과 자주 종단 건설을 위해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 같은 분이 대표적이지요.이번 순례길은 만해 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을 들머리로 잡았습니다.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옆 골목을 따라 200m쯤 올라오면 왼편으로 2층짜리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과 사무처가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선학원백주년기념관)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이의 삶이라고 해서 늘 영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권력이란 움켜쥘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같아서 지키는 것도, 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겨눈 경쟁자의 칼끝을 늘 걱정해야 하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권력을 쥔 이의 삶도 그러한데, 피를 묻혀가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세조는 조선왕조에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첫 임금이자,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첫 임금입니다. 세조는 즉위 과정에서 상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사사하였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권력이 아무리 영화로운들 스스로 짊어진 업보는 쉽게 벗을 수 없습니다. 점점 삶을 조여 오는 올무였을 것입니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입니다. 최고봉인 백운대의 높이가 836m 남짓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 또한 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북한산은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五嶽) 중 한 곳으로 꼽혔습니다.북한산은 봉우리가 험준하고 가파른 탓에 삼국시대 이래 천혜의 요새로 주목받았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했고, 고려는 거란이 침입하자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산성을 축조했습니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뒤 도성을 지키고 임금이 피난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북한산성을 쌓았습니다. 북한산성을 쌓는 일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의 군사와 한양 주민이 동원되었지만, 전국에서 뽑혀 올라온 승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은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을 오래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진실로 밝지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의상 스님이 왕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삼국유사》 조에 전하지요. 왕은 스님의 편지를 받고 역사를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스승의 충언을 귀담아 듣고 실행한 문무왕이기에 병기와 투구를 이 깊은 산중에 감추어 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삼층석탑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아 석탑을 바라봤습니다. 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기를 묻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일구겠다”고 다짐하던 문무왕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승객 서넛을 태운 시내버스는 크고 작은 산과 들판 사이를 내달립니다.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오는 새벽 공기가 꿈길을 헤매던 머릿속을 맑혀줍니다.한 시간 남짓 달린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남도 삼백리길 노선도’가 버스에서 내린 순례자를 반깁니다. ‘남도 삼백리길’은 느릿느릿 걸으며 남도 문화를 느낄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