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생에겐 다 불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는 불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한다. 마치 나무가 겉으로는 모르지만, 서로 비비면 거기서 불이 일어나듯이, 우리도 부지런히 정진하면 선정과 지혜가 나와서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열반경》에서는 우리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두
경전에서는 ‘중생은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불성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불성에 세 가지〔三身佛性〕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신불성은 삼인불성(三因佛性)이라고도 하는데, 정인(正因)·요인(了因)·연인(緣因) 불성(佛性)으로 분류된다. 정인불성은 온갖 중생이 다 가지고 있고, 일체의 삿된 것을 떠난 중정(中正)의 진여로서 이것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 요인불성은 진여의 이치를 비추어보고 도달하여 깨닫는 지혜를 뜻하며, 연인불성은 지혜를 도와서 정인불성을 개발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을 뜻한다. 성인(聖人)은 스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바로 안다고 한다. 그 불성이 정인불성(正因佛性)이다. 이에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 불성 중에서 요인불성(了因佛性)이나 연인불성(緣因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인불성은 진여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이니 지혜의 안목을 얻어야 정인불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연인불성은 불성을 비추는 지혜를 일으키는 모든 선행이니 선근 공덕을 쌓아야 요인불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대열반경 28권 제23 사자후보살품 4 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선정과 지혜를 얻는 일일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대열반에 들어가는 것도 이 선정과 지혜라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과 지혜에 들어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문을 할 때면 항상 선정에 들어갔다가 선정에서 나와서 법을 설하였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에 들
부처님 십호 중에 잘 오신분, 잘 가신분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잘 오셨다고 하여 여래(如來)라 하고, 잘 가셨다고 하여 선서(善逝)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 왕실에서 고대하던 왕자였으니 온나라 백성들이 환영하는 탄생이었고, 출가하여 정각을 이루고 생사고해 빠져있는 중생에게 해탈의 대법을 펴고 대도사로 대열반에 드셨으니 참으로 잘 머물다 가신
부처님은 꾸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음력 2월 15일 열반에 드셨다. 사라쌍수란 쌍으로 서 있는 사라수를 말한다. 사라수는 인도 지방에 자라는 쌍떡잎식물로 높이가 약 3m에 달한다고 한다. 부처님 생애의 중요 변곡점에는 세 가지 나무가 등장한다. 탄생하실 때는 룸비니원에 있는 아쇼카 나무, 곧 무우수(無憂樹) 아래였고, 정각을 이룰 때에는 부다가야에
부처님께서 평생 일관되게 강조하신 말씀은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것이었다. 약 25년 간 시봉하며 누구보다도 옆에서 많은 날을 보낸 사촌동생이자 제자인 아난에게 부처님께서 석장과 바리를 손수 주시면서 당부하신 말씀도 “탐욕과 교만을 버리고 부처가 설한 법을 받아 정진(精進)으로 도행(道行)을 생각하라.&rdq
석가모니 부처님은 카필라국에서 태어나 부다가야에서 정각을 이루고,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굴린 이후 왕사성과 사위성 등을 다니면서 법을 폈으며, 구시나성에서 마침내 반열반에 들었다. 《열반경》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부처님이 왜 하필이면 당시 큰 도시도 아니고 주목 받을 만한 장소도 아닌, 보잘 것 없고 누추한 구시나성에서 입멸에 들었느냐는 것이다. 부처님이 구
우리가 대열반을 얻는 길은 계·정·혜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정·혜 삼학(三學)을 닦으면 어떻게 해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는가. 경에서는 계·정·혜를 닦으면 악(惡)을 파하고 선근이 증장되어 불성이 개발되므로 열반을 증득한다고 한다.먼저 악을 파하는 삼학으로, 첫째는 계를
불교의 수행은 계(戒)·정(定)·혜(慧)를 닦는 것이다. 계는 승가의 모든 규율과 지켜야 할 도리이고, 정은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 선정이며, 혜는 제법의 진리를 아는 지혜이다. 계로 악업을 짓지 않고 덕행을 실천하게 하게 하고, 정으로 마음의 동요를 그치고 평안한 경지를 얻게 하고, 혜로써 어리석음을 막고 진리를 바로 알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오온이 끊임없이 보고 듣고 맛보고 내지 의식하는 것을 우리 몸이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마음이 작용하고〔行〕, 인식하고〔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수행하면 불도를 성취한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서 우리는 오온이 공하다고 하였으니 내가 공하여 없다고 하는데 누가 가르침을 받고 누가 도를 닦아 성취하느냐
속박이란 몸과 마음을 강압적으로 구속하거나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적으로 보자면 중생들이 업(業)과 번뇌의 과보로 몸과 마음을 장애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곳을 우리는 삼계 육도윤회의 세상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곧 해탈은 번뇌와 장애로부터 벗어나 몸과 마음이 자유로
어찌 보면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세상을 잘 보고, 소리를 잘 듣고, 냄새를 잘 맡고, 맛을 잘 보고, 촉감을 잘 느끼고, 의식을 잘 하는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행세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중생들의 세계에서도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은 대개 육근이 잘 갖추어져 있고, 오온이 충실한 사람들이다. 연애인을 보더라도 자신을 포장하고 가꾸는 재주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생사고해의 속박이라고 하고, 이러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사고해의 속박과 해탈은 누가 묶고 누가 푸는 것인가. 이에 대해 《열반경》에서는 현재의 오온과 중음신의 오온과 미래의 오온이 어떻게 삼세를 통해 속박과 해탈하는지 해명하고 있다. 오온은 물질적인 덩어리인 색온(色蘊),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수온
수행을 하여 더 이상 퇴보하지 않는 단계를 불퇴전이라 한다. 수행자가 불퇴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자신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불퇴전에 든다는 것은 성불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경지이기도 하다.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계에서 대체로 세 가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계위에서 퇴전하지 않고, 둘째는 수행에서 퇴전하지 않으며, 셋째는 생각[念]에서
우리가 불성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불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불도를 이루려면 보리심을 내야 되고, 보리심을 냈으면 퇴전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정진해야만 불도를 성취할 수 있다. 《열반경》에서는 중생들이 보리심에서 퇴전하는 모습과 퇴전하지 않고 보리심을 성취하는 길을 칠보산의 비유로 설하고 있다. 어떤 두 사람이 함께 소문을 들었다. 다른 지방에 칠보산이 있
우리는 불성이 있어서 수행하면 불퇴전에 들게 되고, 더욱 정진하여 불도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퇴전하고 심지어 악도에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퇴전하게 만들고 보리심을 파괴해 버리는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에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퇴전하게 하는 13가지 법을 밝히고, 보리심을 무너뜨리는 여섯 가지 법을 설하
시절이 혼탁한 말세의 중생들은 불교에 대해서 두 가지 집착을 일으키기 쉽다고 한다. 첫째는 부처님께서도 일체 번뇌를 끊고 성불하셨으면서도 끝내 입멸에 들었는데 우리 중생들이 갖은 노력을 다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집착이다. 둘째는 생사는 곧 열반이라고 하여 우리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므로 이제 수행이 필요없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천태학에서
불성(佛性)에는 정인불성(正因佛性), 요인불성(了因佛性), 연인불성(緣因佛性)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불성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 지니고 있는데 간략히 정리해보면, 정인불성은 일체의 번뇌를 여읜 진여실상으로서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말한다. 요인불성이란 진여의 이치를 비추어 보고 도달하여 깨닫는 지혜라 한다. 연인불성이란 지혜를 도와서 정인불
부처의 성품을 불성이라 한다. 중생들은 이 불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여 흔히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불성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좀 더 착하게 살 것이고 부처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보살도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성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아는가. 《열반경》에서는 두 가지 불성
열반이란 우리 중생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집착 근심 걱정이 사라진 청정한 경지, 지혜를 닦고 수행을 쌓아서 완성되는 깨달음의 세계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와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라고 한다. 생사의 번뇌로부터 떠나 있어서 지극히 고요하고 청정하고 안락한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