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산수유가 피어나고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은 성큼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움추렸던 몸과 마음을 한껏 펼치면서 그 봄의 기운에 걸맞는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함께 찾아들어 잠시 주춤하게 될 때가 있다. 하나는 꽃샘추위고 다른 하나는 미세먼지다. 꽃샘추위는 말 그
어떤 봄도 쉽게 오지 않는다. 봄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을 지닌 입춘(立春)은 늘 강추위나 눈보라와 함께 다가오고, 남쪽 금둔사 앞마당 자리했을 납월매(臘月梅)의 그윽한 향기는 얼어버린 눈송이 껴안아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쉽게 펼쳐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흔
시계로 잴 수 있는 인위적인 시간의 흐름은 지속과 변화의 중첩된 양상으로 다가오곤 한다. 찰나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불교의 시간관에 따르면 동일한 시간의 지속도 영원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눈 앞 달력에서 저물어가는 한 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우리 개인과 사회의 역사로 쌓이며
“불교가 무너지면한국 정신세계가 무너져” 조계종 무능에도 불구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유 우리는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요즘은 도심에 주로 머물게 되면서 땅이 아닌 아스팔트를 밟거나 자동차 페달과 브레이크를 밟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고, 우주공간에서는 발을 땅에 닿게 하는 일 자체가 힘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땅으로
고향마을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을 걸어 다닌 그 길은 때로 2, 3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특히 지금처럼 큰비가 오거나 큰 눈이 내릴 때면, 길이 끊어져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핑계가 되어주곤 했다. 그런 망연한 기억의 한 자락에 연방죽과 연꽃의 화사한 반겨줌이 있다.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 입구에 있던, 크지도 작지도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사실 관계에서 잘못이 발견되면 ‘틀린’ 의견이라고 배척하면 되지만, 많은 경우는 사실 관계 확인이 어렵거나 동일한 사실 또는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특히 그 일에 나도 당사자로 포함되어 있을 때는 자신의 의견을 확정해야 한다는 부담을 추가로 안게 된다. 지난 주말 일이 있어 광화
‘사회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다. 사회를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보는 관점에서부터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그 정의(定義)가 다양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그 사회를 직접적인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회학이 21세기 들어서면서 이전만큼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사
지난 주말에도 여전히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에 헌법질서의 위기를 초래한 대통령 퇴진을 열망하는 분노의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벌써 여러 번에 걸쳐 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는 데도, 여전히 ‘나는 전혀 죄가 없고 굳이 죄가 있다면 주변 사람 관리를 잘못한 것 정도’라고 되뇌는 대통령의 표정 없는 얼굴이 빚어내는 분노가
인류 문명의 미래라는 말은 세기말에 이를 때마다 단골처럼 회자되곤 하는 익숙한 개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 과학기술과 군사력으로 무장한 서양세력에 맥없이 무너져야 했던 우리 지식인들에게는 그 미래가 곧 국권회복이었고,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지속가능성의 과제와 여전한 성장의 추구라는 갈등
전쟁 거듭해 온 인류 역사 대안 찾는 화쟁윤리 위해 시대착오적 독재 걷어내야평화는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주로 지칭하는 소극적 평화와 마음의 평화는 물론 온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조건까지를 포함하는 적극적 평화로 나뉜다. 적극적 평화에는 현재 우리 한반도와 같이 언제든지 전쟁이 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우리
권위(權威)는 어떤 인격이나 지위 또는 역할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하고자 할 때 생겨나는 일정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 권위에는 그 지위나 역할이 지니는 힘에만 근거하는 폭력적 권위와 그 전문성과 도덕성에 근거하는 전문적 권위와 도덕적 권위 등이 있다. 종교적 권위는 종교적 인격 또는 역할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되는
다시 석가탄신일을 맞는다. 1700여 년 전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수없이 맞아온 석탄일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올해는 오월에 맞게 되는 이 날이 조금은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국내적으로는 4월 총선으로 절망뿐이던 이 땅에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이 내리는 듯도 하고, 국제적으로도 한 무슬림이 영국 런던 시장에 당선되
우리 시민사회는 안녕한가? 어김없이 다가오는 선거철 즈음, 우리를 대표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맨 얼굴을 마주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들의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 망설임과 어색함은 아마도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을 몰수하는 일이 잦아지는 그들의 행태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고, 유권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이는 공천다툼
세계(世界)는 원래 인간들이 사는 세상[世間]과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이 사는 세상[器世間]을 통칭하는 불교 용어지만, 이제는 특히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폭넓게 사용되는 일상어가 되었다. 각 국가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많은 것들을 서로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을 처음에는 지구화(globalization)라고 부르다가, 국제교역 등으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지 못한 교육 맹목적 경쟁으로 몰아 성찰하는 연말 되었으면우리 사회에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판단에 근거한 현실 분석이나 대안 제시보다는 이분법적 편견과 적대감에 근거한 비난이나 냉소주의가 훨씬 더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다. 20세기 한국인의 가치관이 지니는 특징을 물질주의와 감정주의 등으로 규정했던 윤리학자 김태길의 주장이 그가 이미 피안
윤리나 계율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억압의 이미지나 경직되고 답답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나 국민윤리 같은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고자 했던 독재자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계율도 마찬가지다. 선불교 중심으로 정착한 한국불교계에서 유독 계율에 관대한 정도를 넘어서 바라이죄
팔월 더위가 절정인 곳에 입추(立秋)라는 절기가 들어앉아 있는 절묘함을 몸으로 느끼는 시절이다. 가끔 감당할 수 없는 땀을 견디며 걷다가 그늘에 들어서자마자 스미는 서늘함 속에 그 가을의 기운이 담겨있고, 가을은 다시 겨울, 봄으로 이어지며 삶의 심층적인 구비들을 채워갈 것이다. 이 여름의 한 복판 속에서 ‘세계 최초의 법’이라는 &l
‘메르스’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바이러스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으로 침투하고 있다. 확진 환자의 숫자나 사망자 숫자와는 상관없이 당분간 이 바이러스는 우리 일상을 지배하며 확산될 기세다. 공포영화에서나 보았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오는 전철역에 들어서노라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불
'힘이 곧 정의' 여전히 존재 법 집행과정 엄중 감시해야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외적인 강제력에 의지하는 힘의 질서와 내적인 규범에 의지하는 도덕적인 질서라는 두 차원의 질서를 근간으로 삼아 유지되어 왔다. 역사의 발전은 주로 앞의 질서에 비해 뒤의 질서가 더 주목받거나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관계맺기가 공정하지 못할 때 저항에 직면, 상호주의 윤리 심화돼야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이거나 딸, 아들 또는 손주이고, 직장에서는 사장이거나 사원, 아니면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런 역할 중 어떤 것은 우리의 선택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상당한 것들은 스스로 선택하거나 받아들인 것들이다. 물론 그 역할을 받아들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