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문종 29년(1075)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일을 잘 알아, 학사들의 신망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1)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의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는데, 삼국유사는 단군을 나라의 시조(國祖)로 언급
필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비록 수심결(修心訣)에서 자심(自心)을 영원불변하는 자아(自我)로 해석되기 쉬운 표현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을 실재론적(實在論的)이었다고 단정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눌은 자심(自心)을 우리에게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설파하지만, 그러나 자심을 인간 삶의 궤적
(3) 최연식은 “《진심직설》에서는 진심(眞心)을 말한다. 이는 여래장적인 표현이고 지눌의 중생심이 바로 근본보광명지의 현현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라고 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견해를 달리한다. ① 먼저 지눌 사상과 여래장 사상과의 관계를 보자. 여래장 사상은 ‘일체 중생이 여래장&rsqu
필자는 최연식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1) 첫째, 서지적 입장이다. 1) 개원사본이 《수심결》-《진심직설》의 체제가 아니라 《진심직설》-《수심결》의 체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 최연식의 주요한 논지 중의 하나인데, 이 문제는 오히려 반대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왜 이 두 책을 같이 묶어 놓았을까? 지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같은
우선 최연식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1) 첫째, 서지적 입장이다. 1) 연구자는 《진심직설》이 우리나라에서 보조의 저술로 알려진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1) 명장에 수록된 《진심직설》은 《고려국 보조 선사 수심결》의 바로 뒤에 연이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뒷부분에 지눌의 《계초심학인문》과 몽산 덕이와 관련된 법어 3편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진심직설(眞心直說)》은 선(禪)의 의미를 마음〔心〕 일자(一字)에 함축하여 15장(章)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7128자로 구성되어 있는 글이다.1) 보조 국사 지눌이 45세쯤에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판본은 전하는 것이 없으며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중국에서는 ① 명(明)의 대명삼장성교(大明三藏聖敎, 北藏) 돈자(敦字) 권8(卷八) ② 명(明)의
지눌이 각각의 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전체를 뭉뚱그려 간(揀)하는 것과는 달리 혜심의 《간병론(揀病論)》에는 각각의 병에 대한 간이 구체적으로 딸려있다.1) 혜심이 《간병론》에서 표방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간화선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이며, 나머지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론이다. 혜심의 선적 태도는 《간병론》 전반부에서 선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10)은 스승인 수선사 1세이자 조계종의 중흥조인 보조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2세가 된다. 혜심은 무신정권으로부터 존경과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당대의 권력자 최이(崔怡)가 여러 번 개경으로 초대했지만,1) 스승인 지눌이 그러했던 것처럼, 끝내 사양하는 등 정치권력과 일정한 현실적 거리를 유지하고 수선사의 독자성
지눌은 선사(禪師)이다. 그러나 지눌은 선사이면서도 화엄교학을 공부했으며,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화엄교학과 선종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선적 수행을 하려는 자들에게 교학적 토대를 마련해주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학자들에게 선적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이다.1) 그는 개인적으로는 화엄교학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는 송대(宋代) 선(禪)이 이전의 형식만을 답습한 결과, 당대(唐代) 조사선(祖師禪) 이후,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채 문자선화(文字禪化) 되면서 지금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 그대로가 하나의 공안으로 이루어지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을 대단히 개탄한다. 그렇기 때
간화선(看話禪)은 고려 수선사(修禪社) 제1세 보조 국사 지눌(普照 國師 知訥, 1158∼1210)에 의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며, 이후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가 입적한 후 3년이 되는 해인 1166년(건도 6년) 8월에 경산(徑山) 묘희암(妙喜庵) 명월
당시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결사운동은 조계종에서 뿐만 아니라 천태종에서도 있었다.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1245)가 중심이 된 백련사(白蓮社) 결사(結社)가 그것이었다. 요세는 천태교관을 수학하고 23세 되던 1185년(명종 15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1198년(신종 원년) 봄에, 개경에 있는 천태
세 번째 전기는 41세(1198년) 되는 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일어났다. 지눌에 의하면 “마치 어떤 물건과 같은 것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더니, 지리산에 있을 때에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얻었는데, 거기에 ‘선정(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
13세기 전후의 고려사회는, 특히 무신란(1170년)을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하여,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한 격동기였다. 이것과 맞물려 불교계 내부에서 많은 자각과 반성이 있게 되고, 이것은 결사 운동으로 농축된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개창한 수선사(修禪社)와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
결사(結社)란 뜻을 같이하는 도반(道伴)들이 자기네의 신앙에 대한 수행을 위하여 맺은 단체라는 의미로서 이러한 모임의 사원(寺院)은 사(寺)가 아닌 사(社)라고 불렀다. 주지하듯이 결사는, 불교가 그 시대에 반하여 각종 폐단을 극명하게 노출하는 등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뜻있는 불승(佛僧)들이, 일종의 수행 공동체를 결성하여, 절집 본래의 가풍을
해동 천태종의 창시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일찍이 원효(元曉)를 숭모하고, 의상(義湘) 등을 공경하였다. 의천은 이들의 원융(圓融)을 받아들여서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계승하고 중흥함으로써 교관병수(敎觀竝修)의 천태관을 확립하였다. 이 사상은 또한 고려의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에게로 이어지며, 멀리는 조선의 청허 휴정에게로 이
우리나라 천태종을 창시한 고려 중기의 불승,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을 부친으로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를 모친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義天)이며,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간행하였으며,
고려시대의 불승 균여(均如, 923~973)는 속성이 변씨(邊氏)였으며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균여는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둔대엽촌(遁臺葉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누런 봉 한 쌍이 내려와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6년 뒤,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이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위의 비문에서도 나타나는 바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혜철 선사로부터 선을 배웠다. 주지하듯이 그는 혜철의 문하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선의 구경을 체득함으로써 혜철선사의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혜철 선사도 풍수지리설을 익혔음은 혜철비문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혜철이 당에 유학 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