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독립은 자존심 있는 민족에게 당연한 일인 것이지 일제의 총독정치의 탄압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독립운동은 절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 행동인 것이다.만해 스님은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스님은 차디찬 옥중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여 전개하였다. 그러나 스님에게 3년에 걸친 수감생활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했던 동지 하나둘 변절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번민과 회한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관된 신념을 한시로 표현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고, 누구보다 투철한 독립정신을 지키면서 감옥에서 를 집필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항일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해 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민족대표 뿐만 아니라 일제하 독립 운동가가 대거 수용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형무소였다. 이번 장에서는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만해 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거나 처형당한 수난과 아픔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서대문형무소는 경성감옥에서 유래되었다. 1907년 12월 27일 법부령 제1호로 한성부에 감옥서(監獄署)를 설치하고 경성감옥서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10월 21일 법부고시(法部告示) 제8호로, 경성감옥을 10월 19일 독립문 밖 신축 감옥으로 이전하였음을 고시하였다. 이로써 서대문형무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경성감옥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저항했던 의병세력과 계몽운동세력을 일반 대중과 격리·감금하여 민족적 저항의지를 꺾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 이 감옥은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 병신이 돼서 나오는 곳’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다.1912년 9월 3일 경성부 공덕리(孔德里, 현재의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설치하고 종래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로 개칭하였다. 1923년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권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를 살며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던 삶의 터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한 만해는 자신의 사상을 고답적인 이론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낸 한 근대 불교계 지성인이었다.은산철벽 같은 식민지 상황 속에서 대장경의 숲을 헤치며 자신을 연단하듯 인고의 시간을 보낸 만해가 집대성한 《불교대전》의 시대성이나 역사적 의의 등은 앞으로 활발히 개진되어야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앎과 삶의 조화를 이루며 수행자(禪師), 종교인으로서 삶의 전범(典範)을 보여 주었던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은 다문화, 다종교 상황이라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묵은 것과 새로운 것, 뿌리 내리고 있는 것과 새롭게 이식되는 것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나 당대 문화에 합당한 몸짓으로 거듭나 창조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해의 치열한 자기 쇄신의 모습은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진정한 종교인, 사상가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불교대전(佛敎大典)》(1914)은 한용운 불교사상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불교대전》을 독해하는 하나의 쟁점으로 《조선불교유신론》과 얼마나 유기적 관련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불교대전》이 일반적 경전과 달리 근대불교라는 시대적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대전》의 집필 배경으로써 《조선불교유신론》과의 상관성 및 《불교대
나는 만해를 안국동 선학원으로 찾아간 일이 있다. 마주 앉아 점심으로 상치 쌈을 먹는데 만해가 말했다. “원, 세상에 육법전서를 읽어가며 독립운동 하는 꼴은 처음 보았으니 한 번 들어보오.”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동지들이 모두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인데 허헌(許憲)이 육법전서를 차입시켜 열심히 읽고 난 후 같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은 선학원 창건 1백주년에 즈음하여 완공된 건물이다. 그래서 이 기념관을 가리켜 불교계에서는 그 애칭으로 선학원 백주년 기념관이라 부른다. 선학원의 상량식은 만해 스님 출소 직전인 1921년 11월 30일에 봉행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인 1921년의 일이다. 상량식 봉행의 네 달 후,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기미년 3. 1독립운동에 있어서 독립선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며, 3·1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약삼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 김상현 교수는 “선언서가 눈이라면 짤막한 이 공약삼장은 눈동자다”라며 &l
1. 종교수행인 만해 만해는 자신이 불교를 믿는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불교는 그 신앙이 자신적(自身的)이어서 오직 자신의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佛)을 성(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자아라 함은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이 아니ᄃᆞ. 사람과 물을 통한 ‘자아&r
다종교 상황과 종교 인식 근대 한국불교는 기독교의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반종교운동 등에 반응하면서 종교의 의미나 그 역할에 대해서 종래에 비해 한층 더 깊은 해석에 이르고 있었다. 서구 문명을 등에 업고 급속히 성장해 나가는 근대화된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라는 양대 흐름에 직면한 불교계는 그 당시 막 유입된 ‘종교’라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계열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술국치 이후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은 자금으로 조선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생존과 문화 창조, 번영과 향상을 성취하려면 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만해 스님은 민립대학 발기 총회가 개최된 종로청년회관으로 향했다. 이날은 제2회 ‘선우공제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선우공제회는 1921년 11월 30일 선학원 상량식 넉 달 뒤,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발기를 위해 모였고, 그해 11월 3일 제2회 임시총회, 1923년 3월 29일 제2회 정기총회, 1924년 11월 15일 제3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선우공제회 발기와 총회, 그리고 정기회의에 참석한 스님 명단을 검토해보면, 만해 스님은 제2회 정기총회를 제외하고 주요 회의에 모두 참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우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임시의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임원 선거 결과 수도부 이사로 선임되었다. 결국 민립대학 발기총회에 참석하느라 만해 스님이 선우공제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명단에 빠진 제2회 정기총회는 1923년 3월 29일에 열렸는데 같은 일자 신문보도에 ‘금일 민립대학 발기 총회’란 제목의 기사가 있다. 당시 고등교육을 향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전국 각지의 모금과 여러 계층의 관심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학생을 위한 전문대학과 종합대학교가 한 곳도 없었던 까닭에, 5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후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편제로 개편)를 졸업한 조선학생이 대학에 가고자 한다면, 일본 중학교부터 다시 입학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일반 가정에서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선학원에서 주석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던 만해 스님의 당시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독립운동 일지를 남길 수 없는 사회 상황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일경의 감찰기록 내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겠다.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에 대한 일제 학무당국의 가혹한 처벌문제를 두고, 스님은 이를 신문지상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스님 역시 6·10 만세운동과 대동단 의거로 선학원에서 일경에 사전 검속되어 고초를 치른 이후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밝힌 스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불교 법맥과 전통에 입각한 임제종 1911년은 임제종 운동과 함께 시작된다. 만해 스님은 이회광의 맹약으로 한국불교가 일본 조동종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해 스님은 1911년 1월 6일 증심사 특별총회를 열었고, 그 이후 박한영 스님과 송광사, 백양사, 범어사, 통도사를 넘나들며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
1910년 12월 8일 밤, 만해 스님은 불교개혁사상이 담긴 《불교유신론》 원고에 최종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백담사를 떠났다. 그가 백담사를 떠난 이유는 원종(圓宗)의 ‘조동종 맹약’ 때문이었다. ‘조동종 맹약’은 한국근대불교의 최초 종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불교 성향이 강했던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曹洞宗)간의 비밀조약 사건이다. 1910년 10월 초에 원종의 대표인 해인사 승려 이회광이 일본불교 조동종의 본부를 찾아가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비밀조약을 맺고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이회광의 행보에 분노한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의 사찰은 조동종 맹약체결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하였다. 만해 스님도 이 소식을 듣고 한국불교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찾는 것에 동참하기 위해 《불교유신론》의 초고를 상좌인 이춘성에게 맡기고 초겨울, 백담사를 떠나 전라도로 향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아왔던 조선불교가 구한말에 나라로부터 종단을 인가 받기 위해 조동종과 비밀조약까지 맺어야 했던 시대 상황과 그에 대항하여 임제종 설립, 사찰령 반대운동, 선맥 계승운동, 교단 개선운동 등 만해 스님을 주역으로 일어났던 불교개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특성을 간파한 한용운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은 원초적 특성으로 영원하리라’ 여겼으며, 오히려 반종교 운동을 펼치는 사회주의자들의 마르크스를 향한 맹목적 믿음이 미신 혹은 광신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역으로 비판하였다. 한용운은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평생 불교의 그늘 아래 자신의 다양한 행적들을 펼쳐 나갔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숨 가쁘고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호기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의인 걸사의 포부를 지녔던 한용운으로 하여금 다양한 삶의 경험을 요청하였다. 그는 1905년 27세에 정식으로 출가한 이래 1944년 66세의 일기로 입적할 때까지, 근 40여 년간 선사로든 거사로든 수행자로서의 일생을 산 불교인이자 종교인이었다. 1933년부
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1911)는 재단법인 선학원 제 13대 이사장 효일 범행스님께서 발행한 《재단법인 선학원 약사》(1986)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불교운동과 종지 수호의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근대불교의 정신을 각성하게 해준 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rsq
선학원의 시원이라 할 보종운동(保宗運動)인 임제종 창시가 만해 용운스님을 위시로 사부대중의 활발한 참여로 전개되었던 1911년 이래로, 1921년의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과 준공, 1922년의 ‘선우공제회’ 창립을 돌이켜 보건대, 건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절은 참으로 예사롭지 아니하다. ‘
백담사에서 심우장까지 유천(만해)이 처음부터 승려가 되기 위하여 가출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출병하여 국토가 외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시국을 지켜보면서, 유천은 삶에 대해 회의하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던 유천은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의지만을 가지고 한양을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한
들어가는 글 제국주의 일본의 강압통치라는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려는 정책에 따라 그 전통성을 잃어버리고 친일적 성향은 기본으로 왜색화 되어버렸다. 이렇게 한국불교의 미래에 짙은 안개가 내려졌을 때, 한국불교의 올바른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던 대표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가 선학원의 창건과 선종 재흥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